잔소리도 그립다.
엄마들은 대부분 자연스럽게 잔소리 대마왕이 된다.
잔소리의 출발점은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것에서 친절한 의도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모든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첫 번째 교사가 맞다.
물론 처음 알려줄때는 친절하기가 그지 없다만
비슷비슷하고 똑같은 일이 반복되어 가면
아무리 천사표 엄마도 지치기 마련이다.
소리가 커지고 얼굴이 굳어지고 마침내는 폭발하는 시점이 오기도 한다.
우아한 엄마란 교사란 존재할 수가 없다.
한번 말을 하면 딱딱 알아듣는 아기나 학생이나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다.
본인은 알아들었다고 생각할테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다.
그런데 머리가 조금 커지고 나면 그 잔소리가 그렇게 듣기 싫어진다.
사춘기가 되면 내가 세상을 다 아는 양 거들먹거리게 되고
엄마나 선생님의 잔소리는 귓등으로 흘리게 되고
귓등으로 훌려서 찐하게 손해를 보거나 아픔을 얻게 되면
그제서야 <엄마나 선생님 말을 잘 들을걸> 하는
큰 깨달음을 얻게도 된다.
누구나 이런 과정을 거치니 나만 부족하다거나 모자라다고 슬퍼할 일은 절대 아니다.
나도 그랬었다.
누가봐도 분명한 잔소리 대마왕 엄마였고
귀를 틀어막기도 했고
내가 그것도 모르겠냐고 대들기도 많이 했고
아예 싹 무시하기도 했던
그렇지만 가끔은 내가 놓친것에 가슴 뜨끔했던
결코 착하지만은 아닌 큰 딸이었다.
그런데 이제 그 잔소리를 한번 더 들을 수 있다면
참 좋겠고
그 잔소리의 기본은 엄마라는 위치의 사람만이 갖는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었음을 이제는 절감한다.
물론 아들 녀석도 내가 잔소리 대마왕이라고 할 것이다.
유전과 환경의 합작품이다.
대를 이어 엄마를 닮아 대마왕으로 등극한다만
나는 창피하지도 고칠 생각도 없다.
오랜 교사 경험과 내 개인적인 경험으로
많이 들은 잔소리는 귀에 인이 박힌 것처럼 되고
정말 중요할 때 기억이 나거나 몸이 반응하게 되어 있다.
<왜 그런 경고를 하지 않았느냐> 는 말은 각각의
맡은 역할과 위치에서의 업무 태만이나 마찬가지이다.
이야기를 하지 않고 믿어주고 묵묵히 지켜봐주는 스타일은(있기는 한 것이냐? 관심 부족을 멋지게 돌려말하는 것 아니냐라는 의심을 조금은 한다.)
절대 나와는 맞지 않는다.
관심이 지극하니 안타깝고 걱정되어 잔소리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자연스런 과정은
남편이나 아버지들에게는 일어나지 않는 듯하다.
그들은 자신이 통이 넓고 멋진 스타일이라 잔소리를 안한다고 착각하는 듯 한데 아니다.
애정의 척도가 다른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와 아버지는 절대 같을 수가 없다.
교사일 때 많이 들은 가장 답답한 이야기는 이거였다.
<우리 애는 제 말은 도통 안들어요. 선생님이 이야기해 주세요.>
<우리 애는 저랑은 이야기를 안해요. 선생님이 알아봐주세요.>
말이냐 방구냐.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지 왜 부모의 역할까지 교사에게 넘기는 것이냐.
물론 교사도 오늘 대문 사진의 칠판처럼 빼곡하게 잔소리를 한다만.
치열하게 싸우고 다투고 감정을 상해하더라도
다시 돌아와서 진심을 알아주는게 가족이다.
사춘기 그 격동의 시기 아이들이 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로서 노력을 해야하는게 마땅하다.
여러번 이야기해야 그제서야 그 중요성을 각인하게 되는 경우도 많다.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잔소리를 해대신 우리 엄마 말씀이다.
나는 안다.
나를 이정도로 만들어준 것은 엄마의 그 잔소리였음을
그리고 그렇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것은 엄마의 관심과 사랑이었음을.
잔소리하는데 얼마나 기가 빨리는지 아는가?
엄마 체력과 에너지를 갈아넣은 것이 잔소리이다.
담임 선생님이 잔소리 대마왕이라는 것은 학생들에게 엄청난 관심과 사랑을 보여주고 있는 것임을.
감사할 일이라는것을.
중요 사항 전달이 안된 학급이 잘 될리가 없다.
아무런 잔소리도 하지 않는 무관심이 가장 나쁜 상태이다.
부모로서나 교사로서나.
잔소리를 하지 않고 지켜만보았다는 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감사하다. 어머니의 잔소리가 엄청 그리운 아침이다.
(앞으로 남편에게는 절대 같은 이야기를 두 번도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가 다 알아듣는다면서 질색한다. 분명 못 알아 들었는데. 그러니 비슷비슷한 일들을 계속 벌이고 있다만. 나는 아들 녀석이나 챙기겠다. 오늘 나의 다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