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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은 익숙치 않다.

스며들어갈 것이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어제 오전 나름의 서울과의 이별식.

이번에는 삼성역이다.

이곳으로 이사와서는 가끔 갔던 곳이다.

물론 코엑스에서 관련 전시회를 보러갔던 적도 있었다만

그곳의 멋진 책방을 구경하거나 지하세계로 쭉 이어진 백화점 푸드코트를 가거나

강남의 분위기 파악을 내세운 아이쇼핑 일이 더 중점적이었다.

같은 느낌의 고터역과는 다른 느낌의 강남이었다.

오가는 사람이 많다는 것은 비슷하다만 고터보다는 젊은 층이 더 많다.

백화점 꼭대기층에는 옥상정원이 있어서 강남 한 복판을 내려다 본다는 쾌감을 주기도 했다.

아직 꽃도 꽤 남아있었는데 그것조차 이제 낯선 계절이 되었다.

아무튼 꽤 익숙해진 그곳과의 이별식이

어제 오전이었다.


이미 SNS 에서는 그곳 책방의 크리스마스 장식이 난리였다.

원래도 멋진 책방인데 크리스마스 장식을 멋지게 구석구석 해놓아서

외국인까지도 방문하는 핫플이 되어있었다.

그 많은 사람속에 머물 자신이 없어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오픈런을 기획한다.

치고 빠지기다.

작전은 훌륭했는데 그래도 아침 일찍부터 사람이 엄청 많았고

나는 메인 장식물보다 천장에 매달아놓은 이동하는 전시물에 관심이 더 생겼고(트리는 매번 보는거니까)

마지막에 나오다가 찾은 초록색 눈사람(오늘의 대문 사진이다.)이 낯설었지만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창의력이란 이런 것이다.

낯설고 이상하지만 야릇한 끌림에서 비롯된다.

누군가는 기괴하다고 영 안어울린다고 악평을 날릴지도 모른다만.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는 항상 분주하고 활기차고 생동감 그 자체이다.

그곳에 가면 없던 식욕도 생겨나고 지갑이 절로 열린다.

문어와 미역초절임, 배추와 배추속, 야채로만 구성된 키토김밥 중 남편의 최애 선택은 배추와 배추속이었다.

신기하다.

지난번에는 손도 안대더니

내 예상은 문어와 미역초절임이었다만은.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추론은 이렇게 안맞을때가

더 많다.

그리고 특히 요즈음의 남편을 예상하는 일을 더더욱 그렇다.

익숙하지 않다. 다른 사람인듯 하다.


귀가하는 길 지하철 승강장에서 누가 <교수님> 하고 부른다.

나일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고개는 자동으로 돌아갔고

바로 옆에 내 강의를 듣는 학생이 있었다.

애석하게도 월, 수, 금 어느 강좌인지까지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만.

학교에서 먼 이곳 지하철을 기다리며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데

나를 불러 인사를 굳이 해주다니(슬쩍 도망가는 방법도 있었을텐데)

고맙기만 하다.

친구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었기를 바란다.

그런데 아직 <교수님> 호칭보다는 <선생님> 호칭이 백번 더 익숙하다.


이제 월, 금요일은 10시 셔틀을 탄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여유 있고 느지막한 출근.

그러나 곧 익숙해질 것이고 일찍 나가야하는 수요일이 부담으로 작용할 것이다.

그런거다. 처음에는 불편하고 낯설고 익숙하지 않은데 그것이 곧 일상이 된다.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될 수도 있고

스며들 수도 있고 그것은 사람마다 케이스마다 다 다르다만.

그런데 갑자기 생긴 아침의 네 시간쯤을 어떻게 알차게 보낼지는 아직 계획도 준비도 되지 않았다.

일단 연구 보고서 초안을 작성해보려 한다.

일, 일, 일 나는 일이 취미이다.

물론 그 뒤편으로는 <불꽃야구>를 틀어두었다.

한번보고 두 번 볼때는 못 찾은 것을 세 번째에서야 발견하는 경우도 있다.

이미 여러차례 찐팬임을 인증하였다.

<불꽃야구>는 갑자기 나의 일상이 된 것이 아니라 스며들었다. 나도 모르게.

오늘 퇴근 후가 기다려지는 이유이기도 하다.

익숙한 이곳에서의 날들이 딱 10일 남았다.

그리고 하나도 예상조차 안되는 조치원에서의 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스며들어가리라 믿는다. 늘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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