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는 여덟 번에 걸친 기나긴 여행을 마무리 짓고
도저히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새로운 목적지를 향하게 됩니다.
유치원에 입학한 여섯 살부터
교사로 살고 있는 지금까지
학교는 나에게 매일 매일의 여행지이자 목적지였습니다.
어떤 날은 찾아가기조차 매우 버거운 목적지였고
또 어느 날은 마냥 콧노래 나오는 행복한 여행지였습니다.
공립학교는 5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깁니다.
새로운 학교로 부임하는 그 날의 설레임은
오랫동안을 준비한 해외여행 출발일 느낌과 비슷하고
새 학기를 맞이하는 일은 아직도 나에게는 가슴 뛰는 일입니다.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나와 만나는 운명을 맞게 될 학생들에게
즐거움과 의미를 주는 일이 내 여행의 오롯한 목적입니다.
나의 교사로서의 첫 번째 여행지는 서울 외곽 언덕 위 신설 중학교였습니다.
눈이 오면 학교 올라가는 길이 종이 포대로 눈썰매 타는 곳으로 변하고
언덕 주변 작은 점포와 집들이 빼곡하게 쌓여 치열한 삶을 보여주던 곳이었습니다.
교사가 되고 담임이 되고 나흘 만에 우리 반 학생이
사고를 쳐서 경찰서에 있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당시에는 전화가 없는 집도 있었고
부모님이 모두 일 나가셔서 연락이 안 닿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부들부들 떨면서 처음으로 경찰서에 들어가서 사고친 내용과 이후 일처리 설명을 듣고, 담임확인서를 쓰고, 겁에 질린 녀석을 집에 데려다 주러 나섰습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이미 많이 울고 있던 녀석이 안쓰러워
짜장면을 함께 먹던 그 순간의 먹먹함을 아직도 기억합니다.
가출한 아이를 찾아보겠다고 동네 주변의 PC방을 돌아다니고
(PC방의 자욱한 담배냄새와 시선에 내가 더 놀라는 일이 많았습니다만)
겨울이면 교실 난로에 조각 나무를 넣고 불을 피우느라 손이 까매지고
4교시면 데워진 도시락 반찬들의 다양한 냄새로 수업조차 힘들었던
그 시간들은 나를 이름 없는 무성영화의 조연으로 만들어주었습니다.
아직도 선명하게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습니다.
공부는 못했지만 마냥 착하고 학교에 나오는 것을 좋아했던 기남이가
어느 날부터 결석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지나 수소문 끝에 병원 중환자실에 있다는 소식을 알았습니다.
감기에서 출발한 축농증이 심해져서 귀에서 고름이 나오고 뇌수막염이 되었다고
의식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기남이를 보고
그가 아팠다는 것을 미리 알아차리지 못한,
아무것도 도움을 줄 수 없는 나의 무능함에 화가 많이 났었습니다.
너무 어렸던 나는 가망이 없다는 담당 의사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깨닫지도 못했고
장례식장 대신 지하 방 한 칸에 누워서 이불에 덮여있던
기남이의 시신을 보고서도 믿기지 않아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습니다.
그 후로 나는 조회시간에는 교실을 한 바퀴 돌면서
학생들의 낯빛 관찰하기를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즐거운 일도 많았습니다.
과학실에서 녀석들과 실험 준비를 하고 비커에 계란을 삶아 나누어 먹던 일
텅 빈 학교에서 술래잡기를 하다가 교장실에 숨은 녀석들을 찾아 헤매던 일
체육대회 날 반장 녀석과 손잡고 달리기를 하다가 질질 끌려가던 일
어려운 가정 형편이었지만 수업에 열심인 녀석들이 마냥 예쁘고 대견해서
교직이 힘들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보다 더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던 첫 번째 제자들의 졸업식
아픔과 기쁨이 공존하는 첫 여행지에서의 이런 경험이 없었더라면
나는 이렇게 오래도록 교사로서의 긴 여행에 참여하지는 못했을 것이라고
지금도 연락을 주고받는 그 때 그들에게 이야기 하곤 합니다.
첫번째라서 잘 몰랐지만 소중했던 기억들이 마지막이 되니 더욱 선명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