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쨌든 굴러 굴러 갈 것이다.
매월 말이 되면 다음 달 계획을 세우는 일이 재미있고 신났고 마냥 좋았다.
무엇을 하고 무엇을 입고 그런 소소한 것을 써두는 과정도 그렇고
큼지막한 일을 언제 어떻게 처리해야하는 것을 인지하고 까먹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도 그렇고
계획서를 작성하거나 파일로 만들면서
내 머릿속이 정리되는 듯한 그 느낌이 좋았던 것일 수도 있다.
여하튼 아주 어려서부터 나는 계획적인 삶을
살았던 것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계획대로 된 것보다 안된 것이 두 배쯤은
더 많았을 것이다만.
내가 즐긴 것은 계획대로 되는 그 결과보다
계획을 세우면서 느끼는 즐거움이었을지도 모른다.
원래 여행도 여행가서보다 여행가기전까지
가방을 쌌다가 풀고 계획을 세웠다 지우고 하는
그 기다림의 과정이 더 가슴뛰는 법이 아닌가?
(나만 그랬나?)
그런데 2025년 12월은 감이 1도 오지 않는다.
12월 4일 이사까지만 해야할 리스트가 빽빽하게 적혀있고 그 이후로는 빈칸이다.
물론 강의는 19일까지 진행된다만 나머지 일들은 모두 비어있다.
휴식의 기간으로 비워둔 것이 절대 아니고
아무런 감이 잡히지 않아서 비워둔 것이다.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다.
안그래도 한해를 마감하는 12월이라
마음이 싱숭생숭할텐데
서울을 떠나는 이사까지 겹쳐져서 더더욱 그렇다.
당연하다.
예민한 내가 아니라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라고
애써 마음을 다독여보지만
이 나이에도 무서운 것과 두려운 것과 가늠하기 어려운 일은 존재한다.
그런데 이 나이가 되니 자연스럽게 생기는 될대로 되라 역량값이 있다.
그것이 배짱일수도 무대뽀 심사일수도 아니면 회피 기제일수도 있겠다만
내가 안절부절 아등바등해도 안되는 것은 안되는 것이고
될거라면 어떻게라도 길을 돌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돈이 들어서 그렇지
결국 해결은 되더라는 빅데이터 기반의 역량값이라고 감히 주장해본다.
닥치는 대로 해결해나가고 되는대로 버텨보고 힘들어도 참아보는
그런 야생의 삶을 사는 기본값이라는게 있는 법이라고 나의 그힘을 믿어보자는 마음이다.
따라서 미리 걱정하는 일을 조금씩은 줄여보자 생각한다.
경우의 수를 참고하고 감안은 하고 있으되
너무 절망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으려는 다짐이기도 하다.
너무 일희일비하지 않으려는 평정심을 위한 마음이다.
따라서 내 12월 탁상 달력은 강의일 카운팅 빼놓고는 모두 비워져 있다.
그렇게 비워져 있는 달력은 정년퇴직한 3월 이후 오랜만이다.
3월은 정말 할 것이라고는 없어서 비워져있던 것이고
12월은 할 일은 많은데 감이 잡히지 않고 엄두가 나지 않아 비워둔 것이니
결과는 같아보여도 내용은 전혀 다르다.
오늘은 11월의 마지막 날이다.
다음 주 많이 춥지 않기를, 많이 지치지 않기를,
그냥저냥 잘 굴러가기를
그러기 위해서 어제 네 시 이후는 푹 쉬었고
오늘 두 시 이후도 푹 쉴 예정이다.
운명의 수레바퀴가 어쨌든 굴러 굴러서 나를
조금은 다른 세상으로 인도할 것이고
그 길이 순탄하지만은 않겠지만
큰 사고가 나지 않기만을 기도한다.
(오늘도 후배가 찍어 보내준 남편 출장 배웅길 사진을 대문 사진으로 올려둔다. 요즈음 원픽이다.
비행기를 조종하는 남편의 출장길을 매번
배웅나가고 모시러가는 일도 대단하거니와
그 마음을 알 것도 같다.
무사한 출장길에 대한 기원이 함께 할 것이다.
평생 그랬듯이.
이 사진에 그 마음이 담겨져 있다.
나의 오늘 마음도 그와 비슷할듯 하여 골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