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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다. 겨울아.

욕심은 한이 없다. 조금만 더.

by 태생적 오지라퍼

지금까지 나는 11월이 제일 싫었었다.

내 생일이 있어서 한 살 더 먹는다는 늙어간다는 마음이 들어서였고

첫 추위가 몰려와서 한 번 씩 부들부들 춥고 떨리게 만들어서였고(그러다가 감기에 홀딱 걸리기도 했다.)

휴일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빽빽한 달이어서 이기도 했다.

아마 공휴일이 없는 달은 3월과 11월일 것이다.

학기가 진행되는 기간 동안에 말이다. 방학은 예외이다.


그런데 올 11월은 조금 다르다.

10월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서

올해 단풍과 가을을 즐기기는 글러먹었다고 생각했었는데

11월이 생각보다 포근해서 늦게까지

꽃이랑 단풍을 볼 수 있게 해주었고

서울을 공식적으로 떠나기 전 산책을 충분히 즐기게도 해주었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없다.

고운 단풍도 아직 남은 꽃들도

역주행을 하고 있는 몇몇 꽃들도

나의 올해 11월을 쓸쓸하지않게 만들어주었다.


오늘 오전 바쁜 일정을 마치고

30여분의 낮잠을 자고나니

내일부터 추워진다는 예보가 눈에 들어온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나갈까, 말까를...

나가면 컨디션에 무리가 될지도 모르겠고

안 나가고 집에 있자니 휴식은 되겠으나

딱히 집에서 할 일이 없어 무료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가 이렇게 안 추운 날들을 언제 또 즐기겠나 싶어서 슬슬 집을 나섰다.

명목상으로는 30cm 후라이팬을 장만하겠다는 것인데

실상은 서울을 눈에 한번이라도 더 담아두겠다는 속셈이 맞다.


아직 꽃들이 남아있다.

이렇게 꽃들이 아직 남아있으니 아직 본격적인 겨울이 아니라고 우기고 싶기도 하다.

백화점에는 본격적인 추위를 대비하기 위한

의류 매장과 연말 맞이 선물 코너에 사람이 엄청나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장소에서는

정신이 없고 기력이 빠지기 마련이나

이런 번잡스럽고 소란스러움조차

이제는 그리워질지도 모른다.

내가 가는 그곳은 동생 말에 따르면 조용하기만 하단다.

시끄러운 것보다는 환자인 남편 회복에 훨씬 나을 듯하고

나는 학교 및 기타 돌아다닐 곳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이니 그다지 걱정하지는 않는다.

조용함을 즐기면 된다.


아직 본격적인 힘을 보여주지 않은 올 겨울아. 고맙다.

종강할 때 까지만 아니 이사하는 다음 주까지 만이라도(욕심은 한이 없다.)

첫눈은 좀 참아주면 좋겠다.

지금까지 잘해준 것처럼 조금만 더 자비를 베풀어주면 좋겠다.

원래 없는 사람들에게는 추위가 가장 무서운 법이란다.

내 말과 숨은 뜻을 잘 알아들어주었으면 참 좋겠다.


(그 와중에 우리 레전드 야구 선수들이 일본을 멋지게 이겨주었다.

후배들의 복수전이라도 하듯.

일본과의 경기가 이렇게 일방적으로 끝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멋지다.

레전드의 클라스는 여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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