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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

이런 날을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이사하고 나서 처음으로 특별한 일정이 없는 날이다.

정년퇴직을 하고 3월부터 5월 정도까지는 이런 날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래서 오전 산책과 오후 산책이 일상의 주 메뉴인 날도 많았었는데

계속 바쁘고 해야할 일과 처리해야할 일로 가득했던 날들을 보내다보니

이런 오늘이 엄청 낯설고 이상하다.

내일부터 다음 주 금요일까지는 엄청 달려야하니

오늘 충분히 쉬어주는 것이 맞다는 생각은

머릿속에 가득하나

이상하고 낯설고 마음이 잡히지 않는다.

아마 서울에 있었더라면 이런 날은

고터로 가서 옷 구경을 하거나

백화점 지하 푸드코트를 돌거나

아니면 서울숲이나 뚝섬한강공원을 돌면서

겨울바람을 맞았을지 모른다.

그랬다가 콧물만 훌쩍이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만.


강의 나가는 막내동생을 데려다주면서

인근 주유소를 파악하고

차에 기름을 가득 넣어 돌아왔고

쓰레기 분리수거를 하면서 두부를 사와

저녁으로 먹을 청국장을 심심하게 끓여두었고

주소가 변경되어서 어떻게 하는지를 문의한 후 자동차세를 냈고

전입신고 완결도 확인도 했고

자잘한 이사 관련 주소 변경 사항등을 처리했고

그리고 가장 중요한 다음주까지의 강의 자료 업로드와 기말평가 시험 문항도 최종 픽스했는데도

아직 하루가 많이 남았다.


점심을 먹고 남편과 짧은 산책을 나선다.

며칠전 혼자 산책하고 와서 집 뒤로 호수가 있고

거기서 오리 한쌍을 봤다해서 궁금했었다.

아뿔사. 오늘 가보니 집 뒤에는 저수지가 있고

꽤 큰 왜가리가 혼자 노닐고 있더라.

호수면 어떻고 저수지면 어떠랴.

물이 찰랑찰랑 흔들리는 것이 햇빛과 어우러져 이쁘다는 것만 느끼면 되었지.

오리면 어떻고 왜가리면 어떠랴.

그 큰 새가 날개를 휘날리며 저수지 주변을 노닐고 있는 모습이 평화로워보이면 되었지.

그리고 그 산책길 이름모를 산 모퉁이에 태양이 빠꼼하게 보였다.

오늘의 대문 사진이다.

백화점이 없어서 럭셔리한 아이쇼핑을 할 수 없으면 어떠랴.

토요일에 서울에 가서 남대문 시장 투어할 예정이다.

백화점 푸드코트의 맛난 것을 손쉽게 사먹지 못하면 어떠랴.

내 음식 조리 능력을 업그레이드 하는 기회로 만들면 된다.

특별한 일정이 없어서 하루를 낭비하는 것같이 보일수도 있겠다만

나를 다독이고 마음을 다져나가고 체력을 비축하는 오늘같은 날도 있는 법이다.

이제 내 방 창문 위로 해가 떨어지려 하고 있다.

그래도 아직 나에게는 오늘 많은 시간이 남아있고

연말정산 문의와(올해 나는 조금 복잡하다.)

학교 에너지 실태조사 방법 문의 두 건을 처리하면 된다.

내일부터 정신없이 바빠서

오늘의 여유를 한숨쉬며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한치 앞을 모르는게 인생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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