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월 어느 일요일 아침 짧은 단상

해프닝은 언제나 발생한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포장이사를 하였지만 나는 웬만한 물건들은 미리 종류별로 구분해서 짐을 싸놓는 편이다.

아들 녀석은 포장이사인데 이게 웬 촌스런 방법이냐고 매번 뭐라하지만

나는 내 속살을 다 드러내는 그런 스타일의 포장이사는 낯이 뜨거워서 못하겠는데 어쩌냐.

특히 속옷종류와 여름 이불 그리고 자잘하지만

나름 중요한 것들은

모두 팩이나 가방에 따로 넣어두었었다.

물론 잘 넣어둔다고 넣어둔 것이다.

그런데 꼭 사단은 그런 것에서 발생한다.

이사 2주차인데 아직도 못찾은 소중한 물건이 있다.

물론 잘 넣어둔다고 미리 챙긴 것이다.

내가 좋아라하고 대량 구입한 부산발 팬티이다.

부산 모 시장에서 산 팬티가 사이즈도 넉넉하고

(딱 맞는 것을 입으면 배꼽 아래 피부에 닿는 부분이 간지러워진다. 물론 컨디션이 안 좋을 때 한정이다.)

촉감도 질감도 좋아서 지난번에 20장을 왕창 샀었는데

그 중 10장만 먼저 사용중이었고

사용하지 않은 10장을 고이 모셔두었었다.

분명히 이사 2주전에 미리 잘 챙겼었다.

그런데 어디에 두었는지 까마득하고(아마도 가방 중 하나에 넣었을법한데 없다.)

이사 2주후인 오늘 아침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정말 아끼고 소중한 것인데 속상하고

지우개가 되어버린 내 머릿속이 한심하고

이제 화가 나려한다.

이곳저곳을 뒤져보고 있는 내 뒤로

고양이 설이가 한심하다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쫓아다니는 아침이다.


어제 아침 일찍부터 서울에서의 바쁜 날을 보내고

눈을 피해서 안전 귀가를 하였는데(운이 좋았다고 행복했었다.)

집에 들어오니 그 사이에 남편은 인터넷이 안되었다고 하고 설이의 눈에 눈꼽은 가득하다.

눈꼽을 재빨리 닦아주고 남편의 인터넷 문제를 해결하려 나선다.

옷도 갈아입지 못하고서 말이다.

어제 별로 사용하지도 않고 무겁기만해서 심지어 사물함에 맡겨두었던 내 노트북을 연결해보니

인터넷 자동 연결이 되지 않는다.

무언가 사단이 났음에 틀림없다.

남편 노트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무선공유기를 확인해본다.

아뿔싸. 거실의 무선공유기와 함께 연결된 티비도 전원이 나가있다.

감이 온다. 남편의 소행이다.

혹시 하고 보니 거실의 <대기전력 차단> 버튼이 내려가 있다.

이거다. 또 남편이 스위치 버튼을 누른거다.

남편은 이상하게 빈 공간에 전기를 켜두는 것을 질색한다.

알뜰하다고 할 수도 있겠고

어려서 전기불 끄는 것에 대한 철저한 교육을 받은 세대여서일 수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전기 스위치 버튼이 켜져있으면 무조건 끄는 습성이 있다.

항암으로 예민하지도 않고 정교하지도 못한

손의 감각으로 말이다.

이사오기전에는 <일괄 전원 차단> 버튼을 몇 번 눌렀었는데(그곳은 그러면 가스까지 다운이 된다.)

이사온 집은 <대기전력 차단>이라는 거실 뒤편

전력 공급 버튼이 있는데

남편이 아무 생각없이 그것을 눌렀으니

당연히 인터넷과 티비 전원이 나갔을 수밖에.

물론 오해의 소지는 조금 있다.

남편의 주장대로 그냥 <대기전력>이라고만 써두는 것이 더 헷갈리지 않을 수도 있었고

스위치 버튼에 붙여둔 스티커 글씨가 너무 작아서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만.

여하튼 또 모든 일은 똥손 남편에게서 비롯된 것이었고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에 남편은 또 화가 울컥 올라오나보다.

절대 거실 쪽 전원 스위치 버튼을 누르지 말라고 일러두었다.


조심해야 한다.

내일이 남편 18번째 항암주사 맞는 날이다.

주사 전날에는 사소한 것에도 화를 불쑥 불쑥 내더라.

그렇기도 할 것이다. 마음이.

언제까지 항암주사를 맞아야 하는지도 신경 쓰이고

아픈 자신의 처지에도 화가 나고

병원에 간다는 일은 결코 즐거운 일이 아닐테니 말이다.

오늘 하루 참을 인자를 되뇌이면서 남편의 마음에 무조건 동의해주려한다.

이상하다.

꼭 내 마음이 안 좋으면 주변 사람에게 그 화를 표출하게 된다.

나는 그 대상이 거의 엄마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철없고 못나고 나쁜 딸이었다.)

남편은 어머님에게는 항상 더할 나위 없이 착한 아들이고 그 화풀이 대상이 내가 된다.

이래저래 나는 일이 많고 힘든 무수리 일상이다.

어쩌겠나. 기구한 내 팔자이다.

그나저나 어디 숨어있을까나.

내 소중한 새 팬티가 말이다.

이제 뒤져볼 곳도 남아있지 않은데 진짜 꽁꽁 숨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눈이 오려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