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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티 플레이어는 안되겠다. 이제는.

디지털이 가져다 주는 절망감이 있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계획은 그랬다.

오전에 연구 결과보고 관련 업무를 보고

오후에는 잔잔하게 파일 하나 업로드 하는 작업만 하면 되겠다고.

그리고 중간에 싱크대 수전 교체 작업만 이루어지면

될 것이라고.

남편은 점심을 먹고 아산 공장으로 가서 일처리를 하고

내일 CT 촬영등의 검사를 받고 내려온다했고

(병원 검사 일정은 크리스마스 이브 이딴 것은 안중에도 없나보다.)

나는 혼자서 크리스마스 이브를 어찌 멋지게 보낼까 생각하면서

어제보다 평온하고 힘들지 않은 오늘일 것이라 생각했다.


오전 일찍 거의 오픈런으로 세무서 분점을 방문하여

사업자 등록증의 주소를 변경하고(주소 변경 서비스를 신청했더니 벌써 변경이 되어 있더라.)

국세 완납 증명서를 발급받고

그러나 지방세 완납 증명서는 걸어서 7분 거리의 읍사무소에 가야한다해서

또 꾸역꾸역 읍사무소를 방문하여 일처리를 하고(두번째 방문이라 그래도 여유가 있었다.)

주변을 관찰하며 귀가하는 것까지는 예상대로 얼추 맞았다.

어제보다 다소 쌀쌀해진 날씨에 목도리를 귀에 두른 것 빼고는 말이다.

귀갓길에 폐점한다는 가게에서 오프너와 반찬 세개를 놓을 수 있는 미니 식판도 샀다.


오후 두시. 물이 새어나오던 싱크대 수전 교체 업자가 도착하고 일을 막 시작하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서울시교육청 연구비 입금 담당자 번호이다.

그 담당자와의 통화는 항상 즐겁지 않았다.

젊은 사람이 틀림없는 목소리인데 친절이라고는 1%도 느껴지지 않는

지극히 업무 편의주의적 마인드의 소유자이다.

얼굴을 본 적은 없다만 통화 내용이 그렇다.

그리고 꼭 오전에는 연락을 하지 않고 두시 반쯤 되어야 연락을 해서는

내 일생에 처음으로 해야하는 어려운 일인 나라장터 관련 일을 당황스럽게 지시한다.

뭐든지 처음 해보는 일은 어려운 법이다.

마치 <돈을 받고 싶으면 이것을 빨리 처리해.>라고 하는 분위기이다.

갑질의 표본이다. 그녀는 자신의 업무처리방식이 똑 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확실하다.


전화벨이 울리는 순간 알았다.

오늘 오후도 심상치 않겠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연구비 지급을 위해서 나라장터에서 무엇 무엇을 처리하라하는데

암만 들여다보아도 화면에 그 내용이 없다.

할 수 없이 전화를 했더니 자기는 업체쪽 화면은 모른단다.

그럴 것이다. 다른 화면이 보이니 말이다.

그것은 알겠다만.

그리고는 회계 마감일이 바로 코 앞이라고 빨리 처리해달란다.

할 수 없이 나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여

나라장터 온라인 센터에 도움을 받고자 전화를 걸었는데 대기 시간이 십분이 넘어간다.

그 와중에 수전 교체 업자님은 무언가 부품이 맞지 않는다면서

지하주차장과 집까지를 서너번 왕복하고

나에게 이걸 붙잡으라 저걸 붙잡으라 하고 계속 말을 붙여댄다.

내 마음 속에는 이미 불이 붙었고

머릿속은 복잡 다난한 것도 모르고 말이다.


간신히 수전 교체가 마무리되고(한시간은 족히 걸렸다.)

나도 나라장터의 검사검수 요청이 마무리 되었나 싶었더니

이제 지급을 위한 다음 단계를 수행하라

또 그 분에게서 업무지시가 내려왔다.

내용은 잘 모르지만 예, 예, 예를 따라 수행했는데

마지막 세금계산서 송신 부분의 인증서 부분에서

딱 막혔다.

지난번 신청할때도 그랬는데 말이다.


머릿속이 깜깜해진다.

지난번에 인증서를 발급받아두었는데 아무리 찾아도 컴퓨터에 없단다.

또 할수 없이 이번에는 은행 온라인 센터에 전화 상담을 하여 한땀 한땀 인증서를 재발급받는다.

지난번것은 전자세금계산서 발급용이라 안된단다.

왜 또 받아야하는지 도대체 업무 종류마다 인증서가

다 달라야하는 것인지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만.

그리고는 인증서 복사까지 해두고 다시 나라장터에 들어갔는데

이번에는 노트북의 인증서를 찾아가야하는 표시가 눌려지지 않는다.

할 수 없다. 또 나라장터 온라인 상담사를 찾는다.

10여분이 또 지나가고 이제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내 마음은 더더욱 조급한데 연결은 안된다.

대기방송과 특유의 음악만 나온다.

두통약을 결국 찾아먹었다.

이 상황에서 머리가 안아프고 가슴이 답답하지 않을 수가 없다.

기다리고 기다리다가 가까스로 상담사와 연결이 되었는데

안되는 문제점을 이야기하려하다보니

분명 아까 눌려지지 않던 버튼이 이제 눌려진다.

귀신 곡할 노릇이다.

아니 이랬으면 내가 왜 그리 초초하게 안달을 했었건 것이냐.

우여곡절 끝에 나라장터와의 씨름을 마치고 났더니

온몸이 욱신욱신 한판 큰 몸싸움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제 정말 멀티플레이는 안 될 것 같다.

나라장터랑만 일을 보는데도 힘들었는데

오늘은 싱크대 수전 교체 업자님과의 협업도 같이 진행하자니 더 진이 빠졌다.

결국 파일 작업 하나는 저녁에 마저 해야할 판이다.

이래가지고서야 1일 1건 업무 처리도 쉽지 않겠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

팝업창 제거, 화면 확대와 축소비율의 차이,

그리고 날자를 치지 않고 년도와 날자를 일일이 변경해야하는 시스템 등등이다.

내가 이정도니 다른 내 또래들은 어떨 것인가?

그들도 막막하고 힘들때가 많을 것이다.

점점 디지털 문맹인의 세계로 푹 빠져들고 있다.

한발 담갔는데 영 헤어나오기 쉽지 않겠다.

아들 녀석이 그립다.

한 집에 살면 저녁 늦게라도 퇴근후라도 물어보면 되는데 말이다.

물로 좋은 소리는 못듣겠지만.

그래도 오늘 내 브런치를 읽고 후배가 귀여운 탁상달력을 하나 보내주었고

어제 만난 후배는 딸이 LA에서 사온 레몬즙을 선물로 주었었다. 그것이나 보고 기운을 조금은 차려본다.

아제 마지막 문서 작업에 돌입해야겠다.

내일 일찍 크리스마스 이브 출동을 하려면 말이다.

(남은 문서 작업 하나를 머리를 쥐어짜서 겨우 마쳤더니 교육청 그분께서 또 과제를 부여하는 메일을 보내놓고 퇴근하신 모양이다. 4대보험 완납증인데 그것쯤은 정보검색해서 한번에 끝냈다. 피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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