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빡증이 심해지고 있다.

회복보다는 시간을 늦추는게 더 현실적이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무언가를 잘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기억력 하나는 그리고 암기력 하나는 비상했던 편이다.

쓸데없는 것까지 기억을 잘해서 그게 어떨 때는 좋았고 어떨 때는 슬펐다.

잊어버리고 털어내기까지가 쉽지 않은 일들도 종종 있다.

그런데 이제 잘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게 되어가고 있다.

걱정이다. 최근 일만 돌이켜본다.


이사하면서 잘 두었다고 두었다가 놓친

부산에서 공수한 팬티는 아직도 깜깜이다.

크지도 않은 집을 여러번 뒤졌는데도 아직이다.

어느 가방에 비닐에 넣어 잘 넣어두었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어느 가방인지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고

가방이라는 가방은 이미 다 뒤져보았다.

생각날 때마다 울화통이 터진다. 나에게.

그리고는 머플러 하나가 또 행방불명이다.

내 생각으로는 남편에게 하고 가겠냐고 물어보고 빌려준 것 같은데 아니라하고 그 이후로 깜깜이다.

검정색 외투에 어울리는 회색에 붉은 빛이 포인트로 들어간 점잖은 곳에 하고가기 딱 좋은 스타일인데

눈에 안보인지 2주가 넘는다.

이사와서도 분명하고 다녔으니 이 집 어딘가에 있는게 틀림없다만.

얼마 전까지는 검정 가죽 장갑을 못 찾아서

제주 갈 때 김포공항 지하철역에서 임시방편으로 털장갑을 하나 샀다만

다행히 며칠 전 가방을 모아둔 곳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얼마나 기쁘던지.

점잖은 곳에 털장갑은 또 상황에 안 맞는데 말이다.

그 장갑이 있는 곳에 머플러도 같이 있으려나 했는데 장갑만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생뚱맞게.

그 옆에 고양이 설이의 비밀 장소가 있었는데

설마 설이가 물어다 놓은 것인가 싶기도 하고

별별 상상의 나래가 펼쳐지는데

정작 팩트는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가까운 슈퍼갈 때 신용카드나 현금을 바지나 패딩잠바 주머니에 넣고 갔다가

다음 날 아침 지갑을 열어보고 깜작 놀라 주섬주섬

어제 입었던 바지나 옷을 뒤진 적도 몇 번 있다.

그럴 때마다 짧은 순간이지만 가슴이 철렁철렁한다.

기억력이 점점 사라져가는 증상의 치매이셨던

친정 엄마가 오버랩 되면서 말이다.

가장 두려운 일이다.


가끔씩 감자가 있는데 감자를 또 사고

당근이 있는데 당근을 또 사는 수준 정도야

애교라고 넘어갈 수 있겠는데

(그래도 혀를 끌끌차게 되는 것은 사실이다.)

점점 심해지면 보건소에 가서 치매검사라도 해야하나 싶은 마음이 든다.

그래서 아침마다 달력을 보고 세 번씩 되뇌인다.

오늘은 2026년 1월 14일 수요일이다.

이게 치매검사 문항 1번이라고 많은 드라마에서 알려주었었다.

맞나싶지만 그래도 오늘 날자와 요일은 꼭 필요하다.

해야할 일은 탁상 달력과 휴대폰 일정에 기록해서

꼭 크로스체크를 한다만

그래도 예전같지 않은 비상한 기억력에 대한 그리움과 갈망이 가득하다.

그놈의 팬티만 찾아진다면 내 기억력도 다시 돌아올 것 같은데 말이다.

아침부터 속옷타령으로 시작한다.


(기억력 회복 운동으로 지나간 사진을 보면서 그때를 기억해내고 사진을 하나 골라서 그림을 그리는 루틴을 시행한지 일주일 정도 되었다. 오늘 그림의 원본 사진은 어린이대공원 안 호수에 있었던 연잎 사진이다. 남편이 이렇게 많은 연꽃들은 처음본다 했던 날이다. 연잎밥 잘하던 곳에서 몇번 배달시켜 먹었던 기억도 있다. 그림 실력이 늘지는 알 수 없으나 기억력 회복에는 보탬이 조금은 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회복이라기 보다는 더 나빠지는 속도를 줄이는 용도가 맞을지도 모르겠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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