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하게 지나갈 때가 더 많다.

기다리고 있을 때가 더 좋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표면상으로는 방학이 맞다.

하루 하루 지나가는게 아까운 그 방학말이다.

방학이라는 단어와 뗄레야 뗄 수 없는 삶을 살아왔었는데

막상 방학이 되면 그 시간들이 허무하게 지나갔을때가 더 많았던 듯 하다.

기다리고 분홍빛 계획을 세우고 있을 때가 훨씬 더 좋았었다.

내 기억에는 그렇다.


그래도 짧게나마 제주 바다를 보고 온 것이 가장 잘한 일이다.

같이 가자고 나를 부추켜 준 후배에게 감사할 따름이다.

2월 부산 과학관에서 열리는 학회를 가려 했었는데(순전히 여행의 목적이 반이 넘었다만)

같이 가려던 후배가 못가는 사정이 생겨서 쿨하게 패스했더니

부산 바다 사진들이 요 며칠 내 시선을 붙잡는다.

조치원은 내륙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바다일까?

서울에서는 바다를 보고 싶은 마음을 한강을 보면서 대신하곤 했는데

이곳에서는 아직 저수지와 하천만 찾았다.

가장 가까운 바다는 어디일지 찾아봐야겠다.

아들 녀석은 오랜만에 일본에 가서 바다를 질리도록 보고 오겠구나 싶다.

다행이다. 그 녀석이라도 숨구멍이 생겨야하지 않겠나.

입사 10년차인데 왜 작년부터 일이 더 많아지는 느낌이 드는 것이냐.

마치 신입사원일때와 느낌이 비슷하다.

아들 녀석도 나를 닮아서 일을 몰고 다니고 두려워하지 않으며 일에 있어서는 완벽을 추구하는 스타일이다.

그런 것은 또 나를 닮았다.

방학이 없는 직장이지만 휴가 기간이니 방학이라 생각하고 즐기기 바라는 마음으로 가급적 톡도 보내지 않으리라 마음먹는다.

마음만 굳게 먹는 것이다만 생사확인용 <별일없니> 정도만 보낼 예정이다.

어제 구정때 아들이 집에 내려올 KTX 표는 운좋게 예매에 성공했고(우연히 들어갔는데 있더라.)

오늘 아침 7시부터 시작되는 귀경용 SRT 예매 전쟁에

뛰어들 참전 준비를 마쳤다.

명절 기차표 티케팅이라니 생애 첫 도전이다.

아들 녀석은 일본이니 내가 더 나은 가능성 높은 환경일거다.

그런데 별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 어마무시한 명절 기차표가 똥손인 내 차지가 되겠나 말이다.

안되면 올라가는 것은 오송에서 수서 입석도 충분히 가능한 시간이다.

나 말고 튼튼한 다리의 소유자아들이니 말이다.


학생때나 교사때나 방학 전에는 구체적이고 야무진 계획표를 수립하는 스타일이었다.

대부분 못했던 문화생활과 교보문고에 책 보러가고

친구 그룹들 한번씩 만나고 하는 계획이었다만

몇 년에 한번씩 가는 해외여행이 계획된 방학은

무지 무지 신나고 설레였던 것이 맞다.

그랬던 것이 아마도 코로나19 이후로는 외국에 한번도 안나갔던 것 같다. 아니 못나간 것인가?

언제가 마지막이었던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나랑 10년 차이나는 첫 해 제자 녀석은

나보다 6개월 먼저 부부가 명예퇴직을 하더니

이곳 저곳 외국에 나가서 조금은 길게 머무르다가 돌아오는(현지인과 같은 스타일의) 멋진 삶을 보내고 있다.

내가 희망하는 여행 스타일이다.

무라카미 하루끼 스타일말이다.

한국에 있을 때는 인스타에 근황을 올리지 않는데 외국에 나가 있을때는 1일 1인스타를 올려준다.

마치 나에게 대신 느껴보라 하는 듯 감사한 사진들이다.

지금 그 녀석은 따뜻한 치앙마이이다.

그의 동선과 근황을 보면서 나도 다음에 저기 가볼까 하는 생각도 드는데 엄두가 나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혼여로 외국을 가는 것은 해본 적도 생각해본 적도 없으니 말이다.

물론 제자 녀석은 해외여행에 있어서 전문가 수준급인 와이프와 함께이다.

부럽다. 마음 맞는 여행 파트너가 있기는 쉽지 않은 법이다.


대학에 오면 방학이 훨씬 더 길 것 같았는데 전혀 그렇지는 않고 벌써 1월이 지나간다.

내일은 새 학기 대비 교강사 워크숍날이라 핑계김에 서울을 간다만

새학기 대비라는 목적보다는 친목과 으쌰으쌰의 날인 셈이다.

날씨가 너무 추워서 내일 행사에 대한 기대감은 별로 없다.

그런데 별 기대하지 않았을때가 더 좋았던 기억도 있다.

많이 기대하면 허무하게 지나갈 때가 더 많다.

나에게 대부분의 겨울방학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무슨 일이든지 하기 전 계획을 세우다 부수다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 그 때가 더 좋은 것일지도 모른다.


(어제는 제주가 그리워서 집에 있던 돌하르방을 그려보았다. 그림도 나에게 아주 작은 위로를 주긴한다.

못그려서 절망을 줄 때가 더 많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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