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플러와 껍뚜껑
너무 심심해서 알바라도 해야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던 요즈음인데
오랜만에 바쁘고 결단력 있는 오전을 보내고
내일 행사 참가를 위해서 머리 드라이를 하려고
아파트 단지 입구의 헤어숍에 들렀다.
내일은 한 학기에 한번씩 열리는 출강 대학 교강사 워크숍 날이고
내 머리는 파마 예정일을 3주 정도 앞두고 있는 상태여서
아무래도 공식적인 자리이니만큼 단정하게 드라이를 하고 가는 것이 좋을 듯 해서이다.
이사와서 한번 가본 집 앞 헤어숍 원장님은 사람좋은 얼굴로 나의 이모와 비슷한 충청도 사투리를 쓰신다.
자매라도 우리 엄마는 사투리를 안쓰는 깍쟁이 서울 말씨였는데 말이다.
그리고는 쉼없이 이야기를 한다.
아마도 나처럼 수다가 고프셨나보다.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와 동갑이고 아직 결혼하지 않은 비슷한 연배의 아들 녀석이 있는 개인사까지 모두 다 오픈해주셨다.
그렇게 정신없이 드라이를 하고는 드라이한 것이 무색하게 삼십분 정도 낮잠을 자고 일어났고
그때까지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집에서는 커피를 먹는 일이 별로 없는데 사다놓은 에이스 과자가 생각났다.
그걸 하나 먹고는 일을 해보겠다는 마음으로 물을 끓이고
물이 끓는 도중에 관리비 영수증을 꺼내 관리비를 이체하다가
갑자기 목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져보니 항상 목에 있던 얇은 머플러가 없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아까 헤어숍에서 굳이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하라하셔서
머리를 감기 위해 머플러를 풀렀던 생각이 난다.
아까 입고 나갔던 패딩코드 주머니를 뒤져본다. 없다.
들고 갔던 작은 손가방을 살펴본다. 없다.
혹시 하고 입고 나갔던 패딩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어본다. 없다.
갑자기 정신이 홀라당 나간다.
비싼 명품은 아니지만 소중한 지인의 퇴직 기념 선물이고 부피감이 작아서 봄까지 유용하게 사용하는 아이템이기 때문이다.
길에다 빠트렸거나 헤어숍에 있겠거니 하고 다시 다녀올 마음을 먹는다.
그 때 물이 다 끓었다고 삐삐소리가 난다.
아무 생각없이 커피믹스를 담아둔 컵에 물을 붓는다.
에이스 과자는 이미 뜯어둔지 오래이다.
마음이 급해 서두르면서 에이스를 커피에 찍어 먹다가 혓바닥은 델뻔하고 과자가 커피에 떨어져버렸다.
커피에 녹기전에 얼른 수저로 건져 먹고는 머플러를 찾아와서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그리고 커피컵을 그대로 두고 나갔다 오면 고양이 설이 때문에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생전 사용하지 않던 컵뚜껑을 닫았다.
닫는 순간 잘못되었다는 것을 직감한다.
뜨거운 커피물 수증기가 컵과 컵뚜껑을 밀착시킨다는 과학적인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머플러와 컵뚜껑.
졸지에 해결해야 할 과제 두가지가 생긴 것이다.
오랜만에 정신이 홀라당 나가버렸다.
하나씩 해결하자 싶어 아까 입었던 착장 그대로를 다시 입어본다.
그때 알았다. 패딩 안에 입었던 가벼운 경량조끼가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혹시 싶어 주머니를 뒤져보니 머플러가 거기 그 좁은 곳에 숨어있다. 다행이다. 아직 치매는 아니다.
이제 컵뚜껑을 해결할 차례이다.
과학적으로 한다면 이렇게 두 개의 그릇이 밀착되어 포개져 있을때는
뜨거운 물이나 냉장고에 넣어서 기체의 부피 변화를 활용하는 것이 마땅한데
스틸 종류의 컵이라 가능할지 의문이 들었다.
일단 내부에 있는 커피를 뚜껑에 있는 구멍을 통해 다른 곳으로 옮겨담았다.
다행이다. 뚜껑에 구멍이 있어서.
그 다음에는 단순무식한 방법을 써본다.
안경을 벗고는(노안이다.) 컵과 뚜껑 사이의 틈에 끝이 날카롭지 않은 과도를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손을 다칠까봐 걱정 걱정에 조심조심 밀어넣은 첫 시도에 성공이다.
다행이다. 아직 나는 치매가 아닌것이 분명하다.
두 가지를 다 해결하고 나니 해가 뉘엿뉘엿지고 있다.
기력이 있다면 반달을 찍으러 나갔을텐데
그놈의 홀라당 사건때문에 패스한다.
저녁은 남편이 없는 관계로
에이스와 그 논란의 커피로 대체한다.
글의 이해를 돕기 위해 머플러와 컵뚜껑이 보이게 사진을 찍었다.
앞으로 절대 컵뚜껑은 닫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