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2일차 리뷰

누군가를 무엇인가를 기다린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늘도 역시 꼭 해야할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명절 2일차이다.

지금 시각 오후 다섯시 삼십 이분.

고양이 설이에게 이야기를 걸거나 혼잣말을 한 것을 빼고는 딱 두 마디 입을 떼 봤다.

슈퍼에서 <종량제 쓰레기 봉투 작은거 하나 주세요.> 라고 계산할 때 말했고

시댁 형님이 남편과 통화가 안된다고 전화를 주셨길래

<저는 더 안되요. 사리가 나올 예정입니다.> 라고 이야기한 통화가 있다.

그러니 이렇게 열심히 1, 2월에 아낀 목소리로

3월부터 실컷 강의에 전념해도 된다.

목소리 총량의 법칙이다.


얼마나 심심한지 머리 정리도 할 겸 이런 것을 써보았다.

[아들이 오면 봐달라고 할 것]

1. 고양이 사료 신청과 사료 넣어둔 곳 고리 단단하게 정리

2. 프린터 토너 구입 신청과 스캔하는 방법 배우기

3. 재미나이 프로 버전 같이 사용할 것인지와 유료 신청하는 방법 체크하기

4. 에어컨 렌탈 견적 비교 및 신청 일정 논의하기


[내가 해야 할 것]

1. 화장품 사기(토너, 립글로스, 화운데이션, 볼터치)

2. 팔찌 수선

3. 강의 준비물 신청 확인하기

4. 병원 검사와 비타민 D 주사 맞기

5. 파마와 염색하기


그런데 딱히 오늘 해야만 하는 일은, 할수 있는 일은 하나도 없다.

물론 강의 준비는 짬짬이 한다만 닥쳐야 진도가 팍팍 나가는 것이지 지금은 슬렁슬렁이다.

쓰레기를 버리고(집에 쓰레기가 있는 꼴을 못본다. 음식물 쓰레기도 물론이다.)

집 주변을 산책하다가(어제보다 오늘은 바람이 조금 붙더라)

딸기와 아들이 좋아하는 과자 몇가지를 사고는

지하 커뮤니티센터 골프 연습장에 들른다.

어제와 비슷한 시간이라서인지 또 비슷한 분들이 계셨다.

어제 정신을 쏙 빼놓던 그 시끄러운 팀이다.

아주 고수님이신 듯한데 걸걸한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를 하니 나같은 초짜는 정신이 아주 사납다.

오늘은 옆 타석 거구의 아저씨까지 핸드폰으로 야리꾸리한 쿠바 음악 같은 것을 틀어놓고 자꾸 한숨을 쉬면서 공을 빵빵 쳐댄다.

도대체 그 음악과 외모와 한숨과는 전혀 어울리지가 않는다만.

아무리 골프가 멘탈을 중심으로 하는 운동이라 하지만 이건 극한 연습이다.

내가 프로 선수도 아니고 이렇게 극한 연습까지 해야 하나 싶다.

다음부터는 절대 이 시간에 오지 않으리라 중대 결심을 한다.

그러나 개강하고나면 오후 15시 30분 경 골프연습장에 들를수 있는 날은 주말 빼고는 거의 없을 것이다.


저녁 시간에는 조금 긴 호흡의 그림을 그려봐야겠다고 마음먹는다.

긴 호흡의 글도 잘 못 쓰는데

긴 호흡의 그림이 될까 모르겠다만.

이렇게 아무 할 일이 없을 때도 학기 중에는

쉽지 않으니 말이다.

개강을 하면 지금 당연하던 일들이 하고 싶고 그리워질지도 모르겠다.

아까 골프 연습장에서 엄청 떠들던 그 분이 나가시면서

이제 책이나 읽어야 되겠다라고 말하는데서

나는 속으로 빵 터졌었다.

조용히 책을 읽으실 스타일이 전혀 아니던데 말이다.

골프 연습장에서는 그리 시끄러운데 집에서는 과묵하단 말인가?

하긴 나도 강의할때는 완전 수다장이에 투 머치 토커인데

지금 이 강제적인 묵언 수행이 이상하기 짝이 없다.

이러니 내일 아들 녀석이 오면 귀가 따갑다고 할게 틀림없다.

며칠 분량의 이야기를 풀어놓을 예정이니 말이다.

명절이란 그렇게 잔소리 대마왕이 탄생하는 시간이다.

고분고분 잘 들어주려나 모르겠다.

그래도 내일이면 아들녀석이 온다.

나랑 고양이 설이가 기다리고 있다.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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