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감의 연속

꼰대가 되고 싶지는 않은 꼰대의 생각

by 태생적 오지라퍼

정말 진정 꼰대가 되었나보다.

추석 이후 유감스런 일의 연속이다.

다른 사람들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넘어갈 수 있는데 내가 이상하게 변한 것이라면 꼰대가 맞다.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고 유감스러운 마음을 갖지 않도록 노력해야 하는것인지 아닌지는 아직도 판단이 되지 않았다. 이 글을 쓰면서 생각을 정리하게 되면 아마도 판단이 서지 않을까 싶다.


출발은 추석연휴가 끝난 날 아침 출근길에서였다.

지하철을 타고 가면 선택지가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선택지는 대부분 비슷한 난이도를 갖게 마련이다.

난이도가 극심하게 차이가 나면 선택의 난이도는 떨어지고 한 쪽으로 몰리게 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난이도가 비슷하다.

오늘은 왼쪽 방향을 선택했는데 막상 가보니 에스컬레이터가 고장나 있었다.

경로를 선택하는 갈림길에서 대부분 고장 상황을 보통 알려주는데(안내판을 붙이거나 시니어 안내자가 육성 안내를 한다.) 오늘은 그런 안내조차 없었다.

계단을 걸어오르면 건강수명이 길어진다는 그림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200개 정도의 계단을 올라 올라 지하철 한 대를 간발의 차로 놓치고 나니 가쁜 숨만 나오고 울화가 차올랐다.

지하철 역사에서 에스컬레이터 고장은 흔한 일이다.(너무 자주인듯 하지만)

내가 유감인 포인트는 에스컬레이터 고장이 아니라 고장이 났다는 안내 포시가 없었다는 점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사전 안내가 있고 없고는 정말 중요하다.


두 번째 유감이 생긴 것은 그날 점심 급식 메뉴를 보고 였다.

쪽파김치, 달걀말이, 조미김, 돼지고기김치찌개 그리고 미니붕어빵이었다.

쪽파가 엄청 비싼 것도 물론 알지만, 긴 휴가기간이라 식재료 구입이 쉽지 않은 것도 알지만

시판김에 김치도 그냥 뜨면 되고 미니붕어빵도 그냥 놓으면 되고

급식실에서 준비한 것은 달걀말이와 돼지고기김치찌개 두 종류였다.

며칠 휴식을 보내고 다시 출발하는 날 점심으로는 다소 부족함이 느껴지는 메뉴여서 화가 난 것인지

그날 오전 4시간 연강을 하고 힘이 들어서 화가 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가 담당자였다면

같은 메뉴로 내가 메뉴를 정한다면(동일 예산과 동일 준비물로)

돼지고기김치찌개를 분리해서 돼지고기는 양념해서 달달 볶고

김치찌개는 그냥 양파나 파만 넣거나 두부 넣어서 끓였겠다.

그러면 반찬의 격이 맞을 수 있다는 것은 순전히 내 생각이고

나의 음식에 대한 기대감이 높은 것도 알지만 두 번째 유감이 아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유감스러웠던 것은 후배교사들과의 에듀테크 관련 현장 이야기 내용이었다.

각 학교에서 나누어준 수업용 태블릿을 그냥 모셔만 두고 사용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정말 유감을 넘어서서 충격적이었다.

그것도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지역일 수록 더욱 그렇다고 한다.(태블릿을 보면서 딴 짓을 할까 우려하는 학부모들의 생각이 투영된 것이라고)

투여된 어마어마한 예산하며 앞으로 나아갈 수업 방법 개선 등을 생각하면 안타깝고 화가 났다.

중학교에서 다양한 에듀테크를 사용하여 수업을 하면 무엇하겠나

어런 상황에서 AI 교과서를 도입하면 무엇하겠나

교사와 교직원에게 AI 연수를 강제적으로 시키면 무슨 효과가 있겠나

고등학교에 가면 다시 입시 위주, 문제 풀이 위주의 강의식 수업만 존재하는데

수업의 변화라는 것은 이렇게 쉽지 않다.

한가지 형태의 수업만이 최고라는 의미는 절대 아니다.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의 대대적인 인식 변화가 있지 않으면(거의 Paradigm Shift 수준이어야 가능하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내가 열심히 연구하고 공유했던 방법들은 대학이나 영재교육원에서나 실현 가능한 것들이었나 하는 생각에 너무도 많은 유감이 떼거지로 몰려왔다.


마지막으로 유감을 느낀 것은 날씨였다.

추석도 지났는데 더워도 너무 더웠다.

에어컨 없는 복도만 나와도 진땀이 났다.

여름옷을 몇 개만 남기고 정리했는데 다시 꺼내야하나 고민하게 했다.

매년 여름마다 이럴것인가 생각하면 아찔하기만 했다.

그런데 이 유감은 이틀만에 태풍으로 인한 많은 비가 내려서 조금은 해소되어 간다.

그런데 비가 너무 많이 오는 것은 또 다른 유감의 요소가 될 수 있다.


요즈음 너무 자주 유감을 느끼는 것은 맞는 듯 하다.

느끼기만 하고 표현을 하지 않으면 그나마 꼰대는 아닌 척 할 수 있는데 진정 꼰대의 삶에 빠진 듯 하다.

마음을 비우고 유감으로 부터 진화된 화를 내려놓자.

이제 나는 정년퇴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 남은 일생은 비우는 일만 남은 날들이다.

작은 사이즈이지만 묵묵히 할 일을 다하고 있는 소국의 계절이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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