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84
길고 길었지만 달고 달았던 하루
오늘은 다른 날보다 한 시간은 더 일찍 집을 나섰다.
요새 천문학 부분 수업을 하는데 간이 태양 흑점 측정기를 빌려가려고 나선 길이다.
기구 하나에 80만원 정도를 하는데 더군다나 수입품이다.
우리학교와 같은 소규모 학교는 1년 과학과 수업 준비물비가 300만원 정도인데
이 기구 두 개를 구입한다면 다른 실험을 하는데 지장이 많다.
결과론적으로 절대 구입이 불가능하다.
재단에 돈이 많은 자율형 사립고 E여고에 있는 후배의 힘을 빌리기로 한다.
마침 그 후배는 나보다도 더 일찍 출근하는 스타일이라
7시에 학교 정문 앞에서 만나서 1주일 정도 기구를 쓰고 돌려주기로 했다.
올해는 태양 흑점의 극대기이다.
따라서 태양 활동이 활발하여 오로라도 여러 차례 여러 곳에서 발생한다.
SNS 상에서 세계 곳곳에서 그동안 오로라를 볼 수 없었던 곳에서의 사진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내년 여름에는 우리나라에서도 오로라를 볼 수 있을 거라고 혹자는 이야기하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을 확률이 아직은 더 크다.(내년 여름 상황이니 확답은 할 수 없다. 올 여름보다 더 덥고 태양활동이 미친듯이 활발해질수도 있다.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태양흑점 관측을 하는 김에 준비실에 있던 태양 관찰 안경도 꺼냈다. 이것도 수입품이다.
우리나라 교구 업체에서 이렇게 돈이 별로 되지 않는 것을 만들면서
그만한 기술력을 확보하고 있는 곳은 별로 없다.(과학교구업체는 모두 소규모 사업체라고 생각하면 된다.)
태양을 맨눈으로는 절대 볼 수 없지만(본다하면 시력에 큰 상해를 입게 된다.)
마치 셀로판지를 끼어놓은 것 같은 이 허접해보이는 안경을 끼고 보면 볼 수 있다.
학생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지만 한번 써보면 놀란다.
학생들은 오늘 태양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고 태양 흑점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볼 예정이다.
천문학을 전공하는 사람이 되지 않는다면 모두 처음이자 마지막 경험일 것이다.
그리고는 지난 시간에 적외선등을 햇빛이라고 생각하고 해보았던 지구 둘레 측정을
쨍쨍한 햇빛이 비친 5교시에 직접 막대 그림자를 보면서 실험해보았다.
너무 어려운 내용이라 이론 설명-실험실 실험-운동장 실험의 3단계를 거쳤더니 오늘에서야 내용을 이해하는 듯 했다. 이것이 삼세번의 힘이다.
그리고 역시 태양의 힘이란 놀라워서 그림자가 길고 진하게 생겨서 실험과정을 확실히 이해하게 해주었다.
마지막으로 태블릿에 깔려있던 별자리관측 어플리케이션을 구동하여
우리학교 후문 바로 위에 위치한 별자리 찾기 미션을 수행하였다.
오늘은 특별과제도 부여했다.(나는 과제를 절대 내지 않는 스타일인데 말이다.)
슈퍼문이 뜬다는 오늘 밤. 달을 보고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어 구글 클래스룸에 올리라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천문학 공부의 첫 걸음이다. 그리고 달 사진 촬영도 처음이자 마지막일 수 있다.
(이제 달 사진들이 구글 클래스룸에 업로드되고 있다. 나는 핸드폰으로 그 내용을 파악한다. 이런 시대이다. 요즈음 수업의 형태이다.)
옆에서 보던 저경력의 체육 선생님이 신기한지 우리쪽에 와서 안경을 써보고 흑점을 살펴본다.
지나가던 초임 기술 선생님이 갸우뚱하면서 안경을 써보고 학생들의 실험을 살펴보고 놀란다.
마침 들어오던 학교 홍보 영상 촬영 관계자가 반색을 하며 좋아라 학생들이 실험하는 사진을 찍어댄다.
그러나 나는 이번 주일 어려운 내용 강의와 계속되는 실험으로 목소리가 반쯤은 나오지 않고 이미 쉰 목소리가 되어 있다.
그 와중에 3,4교시 비는 시간에는 동대문꽃시장에 가서 도시농부 동아리가 심을 모종을 사오기도 했다.
9월 초에 심은 배추랑 무 모종이 이상 기온으로 거의 모두 죽었기 때문이다.
6,7 교시 동아리 시간에 대파와 양파 모종 및 국화 모종을 심었다.
텃밭 정리를 마치고 들어와서는 얼음 동동 미숫가루를 꿀 왕창 넣어서 타먹었다.
올해 먹은 음료 중에 단연 최고였다.
올해 중 단연 길고 힘든 하루였다.
그러나 학생들에게는 오늘 경험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활동이었기를 희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