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든 처음해보는 것은 쉽지 않다.
나이가 든다고 두렵지 않은 것은 결코 아니다.
이 나이가 되어서도 처음해보는 일에는 다소 두려움이 따른다.
아마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아직도 해보지 못한 일들은 아마도 많이 있을테고
그때마다 나는 잠시 쭈뼛거리고 생각에 잠기고 무서워하면서 안그런척 일을 처리하리라.
늘상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은 난생 처음으로 발가락 양말을 신고 출근했다.
작년부터 오른쪽 넷째와 다섯째 발가락 사이에 티눈이 생겨서 커졌다 작아졌다를 반복했고
전문의말로는 이미 발가락이 꼬부라져서 근원적인 수술 치료말고는 효과가 별로 없을거라했다.
(나는 신발이나 옷 등을 절대 꽉끼게 입지않는다. 따라서 공간이 좁아서 그렇게 된것은 아닐듯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이 꼬부라졌다.)
막내 동생은 초기에 가서 얼음치료로 괜찮아진것도 같다했는데 나는 이미 그 시기를 놓친 것이다.
참을성이라고는 없는데, 다른 일에는 행동이 빠른데, 왜 병원가는 것은 자꾸 참아지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여름에는 양말을 신지 않고 신발도 딱딱한 것을 신지 않고 다녀서인지 괜찮았는데
추워지니 슬쩍 증세가 나타나서 밴드를 붙이기 시작했다.
그걸보던 아들녀석이 발가락 양말을 신어보면 어떻겠냐고 하는거다.
두 발가락이 너무 밀집되어 생기는 아픔이니
발가락 양말로 서로 부딪히는 부위를 막아주면 괜찮지 않겠냐고 의견을 내는거다.
논리적인 의견이다 생각은 했지만
그래도 볼상사납게 발가락 양말이 웬말이냐
발가락 무좀이 심한 아저씨들이나 신는게 아니냐고 속으로 생각했었는데
어제 무심하게 발가락 양말 2개를 화장대에 올려놓고 출장을 갔다.
오늘 아침 신어볼까 말까를 5분 정도 고민하다가
에라 싶어서 신고 나섰는데(이것은 뭐 신는게 아니라 끼우는 거더라)
어라 발가락끼리 스쳐서 아픈 느낌이 훨씬 줄었다.
누가 보면 내가 발가락 양말을 신었는지는 알 수 없으니 창피하지도 않았다.
사진으로보니 우스꽝스럽기그지없다만
이렇게 또 내 인생의 첫 번째가 이루어졌다.
점심 시간에는 주민센터에 가서 몇 가지 서류를 챙겨서 팩스로 이천호국원에 보냈다.
친정아버지와 어머니를 사설 납골당으로 모셨었는데
이제 이천호국원으로 안장하려 서류 심사를 받는 중이다.
국가유공자인 아버지는 이천호국원 안장이 가능했으나
늘상 고향인 부산에 묻히시기를 희망했었다.
부산은 너무 멀어서 한 번 모시면 가보기가 힘들거라 생각하기도 했고
사실 어머니는 죽어서까지 시아버지, 시어머니 아래 묻히기는 싫어하셨었다.
코로나 19 시기에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면서 일단 가까운 납골당에 모셨었다.
그 납골당을 계약하러 나선 날은 비가 엄청 내렸었고
이제는 아파서 꼼짝하지도 못하는 그 동생과 함께였고
그날 나는 잘 걷지 못하는 동생을 보고 그제서야 파킨슨병의 심각함을 확인했었더랬다.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2년이 지나서야 정신이 차려졌는지
우리 후손들에게까지 부모님의 납골당 관리 등을 물려줄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아보니 이천호국원에 납골당 개수를 증축하여 이장 신청을 받고 있다했다.
조금은 멀지만 나라에서 깨끗하게 관리해주는 곳으로 옮기는 것이 나을듯 하다.
신청하고 서류 내고 다시 이장하고 조금은 복잡하겠지만
그리고 처음해보는 일이지만
그래도 누군가 해야할 일이니
부모님을 위한 마지막 효도의 길일지도 모르니
번거로움쯤은 오롯이 감당하려한다.
납골당을 보러가는 일도 처음,
그곳에 두 분을 모시는 일도 처음,
이제 호국원으로의 이장도 처음,
그곳에 계시는 부모님도 모든 것이 처음이실거다.(그곳에서 잘 계시는지요? 무지무지 뵙고 싶어요.)
앞으로도 내가 맞이할 처음해보는 일은 무지 많겠지만
담담하게 맞이할 수 있을 정도만 나에게 주어지기를 기도해본다.
발가락 양말을 처음 신고 출근할 정도의 용기만 있으면 되는 일들만 주어진다면 정말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