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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생적 오지라퍼 Nov 21. 2024

뜨겁게 뜨겁게 안녕

미니멀하게 살자

저녁을 먹고 정리하고 약간은 특별한 하루 마무리를 한다.

내일 아침 일찍 옷을 수거하러 업체가 오기로 한 날이다.

미니멀리즘을 추구하고

정년 퇴직을 앞두고 옷을 정리한다고 이전부터도 많이 버리긴했지만

그리고 매년 학교에서도 무료나눔을 하는 플리마켓 행사를 진행하고도 있지만

나에게는 아직도 많은 양의 옷이 있다.

지금까지는 분리수거장에 있는 의류수거함에 넣었었는데

인스타에서 수거해가는 곳들이 하나 둘 보여서 처음으로 업체를 활용해보기로 했다.

아주 적겠지만 소정의 금액도 준다고 한다.

돈 보다는 그 옷에게 다시 쓰여짐을 부여하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다.

내일 아침이 첫 번째 수거일이다. 종이박스를 준비하고 옷을 차곡차곡 담는다.

20벌이 되어야지만 수거하러 온다는데 30벌에 구두 2개이니 아마도 업체에 민폐는 아닐 것이다.


정리하는 순간에도 눈에 밟히는 옷들이 있다.

먼저 부모님 장례식장에서 입었던 검정 원피스이다.

친정 엄마는 흰색 한복의 상복을 입는 것을 싫어하셨다. 이유는 딱히 듣지못했다.

엄마도 아버지도 긴 치마로 바닥을 쓸고다니는것을 안좋아하셨다.

단정한 검정 원피스를 입어달라고 치매가 심해지기 이전에 부탁하셨더랬다.

그래서 두 분 다 단정한 검정 원피스를 입고 보내드렸다.

다행히 한 분은 1월, 한분은 3월에 가셔서 겨울옷 한 벌로 가능했다.

이제는 상갓집에 가더라도 원피스를 입을 정도로 격식을 차려야 할 일은 없을 듯하여

오늘 나는 그 옷과 이별을 고하려고 한다.


다음으로는 내 스타일이 아니게 화려한 무늬와 컬러가 있는 조끼이다. 

한 겨울 무거운 코트를 입고 가면 옷의 무게 때문에 수업하기가 힘들다.

옷을 벗고 수업하자니 교실은 꽤 춥다.

학생들이 늘상 상주하는 곳이 아닌 과학실은 더더욱 춥다.

따라서 학교에 거위털이 들어간 조끼를 하나 두고 다녔다.

겉옷을 벗고 그 조끼를 입으면 춥지도 않고 가벼워서 수업을 할 때 부담이 되지 않았던 바로 그 옷이다.

어떤 날은 내 스타일이 아니라 생경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나의 칙칙한 옷 색깔을 다소는 살아나게 해주었던 고마운 옷이다.

그런데 더 이상은 나에게 소용이 없을 듯 하여(다른 단색의 조끼들이 아직 많이 있다.)

이것부터 안녕을 고한다.

지금부터 한겨울까지 누군에게인가 가볍고 따뜻함을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바지도 제법 들어가있다.

한 때 내가 가장 이쁘다고 생각했던 일자 청바지이다.

상체는 통통했으나 하체는 제법 날씬했던 나는

상의는 다소 넉넉하게 하의는 그나마 붙는 스타일링을 오랫동안 유지했었다. 

그런데 작년 생일 이후부터 그 스타일의 바지가 영 거슬려보이기 시작했다.

고무줄로 된 넉넉한 일자 통바지가 그리 편할 수 없었고(늙었다는 확실한 증거 중 한가지이다.)

특히 청바지인데 한 두곳에 스크래치를 멋으로 낸 소위 구멍난 청바지는 이제 다시는 못입을 것이 분명하다.

옷 자체는 아직 멀쩡하니 다른 누군가에게 기분전환용으로 소용이 되면 참으로 좋겠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구두 2개가 눈에 밟힌다.

아들 녀석 결혼식이 겨울이라면 신어야지 했던 검정 구두와

만약 여름에 한다면 신어야지 했던 구멍이 멋지게 뚫려있는 여름 베이지색 구두이다.

구두를 장만한지는 꽤 되었으나 아들 녀석의 결혼은 아직이고(이렇게 늦어질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 사이에 나의 오른쪽 발가락에는 티눈이 생겨 구두라고는 신지 못한지 1년쯤 되어가고 있다.

토요일에는 미뤄왔던 얼음스프레이를 이용한 티눈 제거술을 위하여 병원을 방문해야겠다.

구두 굽만 간다면 새구두가 될 것 같은 마음에,

그리고 언제라도 공식적인 자리가 있으면 신어야지 하고 남겨두었던 그 미련을

오늘 저녁 박스에 담아서 깨끗하게 접었다.

옷이건 구두이건 나와 함께였던 추억과 역사를 놓아버리는 것이라 아쉽기는 하지만

그리고 이것을 장만했을때의 기쁨도 살짝 살짝 떠올랐지만

나는 점점 더 삶의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야하고 소유한 것들을 미니멀하게 만들어야 하고

아마도 머지않아 그렇게 될 것이다.

이제 현관문 앞에 포장박스 두개를 내어 놓았고 나는 이것들과 뜨겁게 뜨겁게 안녕하련다.


(출근하려 나왔더니 박스 두개는 이미 수거해가셨다. 잘가라. 원래 이별은 단칼에 하는거다. 질질 끌면 더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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