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않는 혼밥요리사의 비밀레시피 99
8만원어치 찐 행복
한달에 한번 정도 주말 한 나절에 영어능력평가 시험 감독을 한다.
지하철역 5분 이내 거리이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는 학교라서 가능한 일이다.
멀뚱멀뚱 서있는 시험감독 시간들이 어떨때는 무료하고 힘들기도 하지만
다음 주 처리해야할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하고
남은 업무 전개도도 그려보고
무엇보다도 수당 8만원으로 맛있는 것을 먹을 생각을 하면
그 시간이 그렇게 아깝지만은 않다.
오늘이 11월의 그 날이었다.
다행히 어제 처치를 받은 티눈난 발가락이 아침에 일어나니 훨씬 아프지 않게 되었고
아들 특식으로 감바스와 함께 먹을 빵을 준비해두고
오랜만에 차를 가지고 출근길을 달렸다.
밴드곡을 열심히 따라 부르면서 몸도 살짝 살짝 흔들어대면서 말이다.
주말 아침 서울 시내 한복판은 나를 뒤따르는 차도 보이지 않고 고요할 정도이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학교 화단을 한 번 둘러본다.
이제 다음 주 추위를 대비해서 빗물저금통에 급수꼭지도 잠가야 하고
(내가 없을때에 대비하여 행정실에 잘 부탁해두었다.)
한 그루인데 사이즈가 엄청 큰 감나무의 감도 따야하는데 그것은 나의 작은 키로는 불가능하다.
그 옆으로 있는 모과나무의 모과가 커져서 자연스럽게 떨어진 것들도 주워오고
(모과차를 만들고 싶으나 다치지 않게 잘 자를 자신이 없다. 청귤과 함께 넣으면 더 맛있다는데)
떨어져가는 소국을 잘라다 오래되어 이제는 사용이 불가능한 텀블러에 꽂아두었다.
이런 것도 주말에 학교에 나가니 가능한 여유와 호사이다.
아이들이 없는 학교는 평화롭지만 어딘가 낯설기만 하다.
시험 시간 중 자꾸 입을 벌리고 혼잣말을 하고 손짓을 하는 수험생 한 명이 눈에 띄었지만
별다른 이슈없이 오늘 시험은 종료되었다.
이제 어제 선입금된 수당 8만원을 즐길 시간이다.
오늘 점심 특식을 위하여 어제 온라인으로 장을 봐두었다.
만두 1+1, 루꼴라, 달걀 30구, 그리고 소스와 육수가 들어있는 샤브샤브용 고기 그리고
우리집 고양이 설이를 위한 특식 멸치와 연어와 대구 슬라이스포이다.
(설이는 멸치 대가리 따기 선수권자이다. 대가리는 절대 먹지 않는다.)
오늘 점심 특식은 냉장고 털이용 샤브샤브이다.
버섯, 파프리카, 양파, 대파 그리고 마늘 간 것을 넣은 육수를 베이스로 하고
(오늘은 간이 딱 맞아서 맛있었다. 나는 싱거운 것을 좋아하니 그냥 먹고 아들과 남편에게는 소금을 추가로 준다.)
샤브샤브용 고기를 살짝 데쳐서 같이 숨죽여준 루꼴라와 먹던지 아니면 고수를 올려먹던지
그것은 먹는 사람 맘이다. 그것까지 내가 강요할 수는 없다.
소스는 월남쌈 소스와 겨자 약간 넣은 간장 소스를 준비했다.
다이어트하는 아들 녀석은 소스찍지 않고 고기와 야채만 먹으면 되니 부담스럽지 않은 점심 메뉴이다.
오늘은 샤브샤브용 고기가 조금 남아서 남은 고기는 불고기 양념에 재워두었고 내일 아침 식빵 구워 넣으면 불고기 샌드위치가 되겠다.
오늘 먹거리 주문 가격은 오만원 남짓이다. 나에게는 무려 삼만원 정도가 남았다.
오겹살 사서 기름쪽빼고 수육한번 해서 먹으면 되겠다. 겉절이 담가서 말이다.
야호...
시험 감독하느라 신경은 조금 쓰였지만
2주 정도에 내가 해야할 중요한 일을 머릿속으로 정리했고
(방과후 원데이클래스도 열어야 하고 본격적인 학교 축제 준비도 해야하고 시험 문항 출제도 해야 한다.)
따뜻하고 맛난 음식을 나에게 제공해주니 이것이 찐행복이 아닐까나 싶다.
아쉽게도 이 찐행복도 이제 두어번 정도만 누릴 기회만 남았다.
어쩌면 나는 큰 행복을 바라고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루 한 끼의 맛난 식사와 의미 있는 일과 무탈한 건강.
그것이면 행복할만하다. 넘치게 충분하다. 배가 지나치게 부르다.
아무래도 내 배와 머리는 직통 핫라인이 연결 되어 있는게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배 고프면 화가 나고, 배부르면 행복하고 나른해지는 것이 이렇게 순식간일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