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104
매일 매일이 커스터마이징 과정이다.
어제 2학년 4학급은 과학책 진도를 다 끝내가는 것을 축하하는(아직 한 시간 분량 정도가 남았지만)
그리고 크리스마스 분위기와 느낌을 보태는(다음 주부터는 기말고사 대비 요점정리 기간이므로 그것하다가 분위기를 180도 바꿀 수는 없어서)
모 단체에서 선물로 보내온 가죽 필통 만들기를 진행했다.
지난번 기후위기 특강 네 시간을 잘 운영했더니 선물 겸 후속 학습으로 활용하라고 키트를 보내온 것이다.
선물이 맞았다.
보통 이렇게 공짜로 보내주면 선물이지만 선물이 아닌 그런 것들이 많았는데
이번 것은 가죽의 질이나 키트 준비물의 완성도를 볼 때 선물이 맞았다.
다양한 색깔과 질감의 가죽(사실은 업사이클링한 가죽이다. 그점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주었다.) 위에
다양한 색의 유성물감으로 자신만의 디자인을 그리고
접어주면 필통이나 간단한 화장품 케이스로 활용이 가능했다.
아이들에게는 자신이 쓰거나 어머니 선물로 드린다고 생각하고 만들어보자했다.
과학과 미술의 콜라보레이션 시간인 셈이다.
몇몇 추상화를 그려대는 아이들 빼놓고는 대부분 진지하게 그리고 요즈음 시기에 딱 어울리는 멋진 디자인의 그림을 그리고 그 과정에 즐겁게 참여했다.
이럴 때 활동을 준비한 나는 신이 나고 힘이 나게 된다.
물론 미술 교과 선생님의 어려움을 잠시 느껴보기는 했다.
미술도 유전의 힘인지 모르지만 잘하는 학생과 영 감각이 없는 학생의 구별이 분명하더라.
전문가가 아닌 내 눈에도 말이다. 오늘 딱 한 시간을 지켜봤는데 말이다.
그러니 미술 감각이 없고 역량도 없고 하기도 싫은 학생들을 데리고
수준높은 작품을 만들어내야만 하는 미술 선생님도 마냥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교사 사이에서 옛날에 돌던 우스개 소리가 있다.
<보건 선생님, 미술 선생님, 행정실장님은 3대가 공을 쌓아야 할 수 있다.>
이제는 다르다.
코로나19 이후로 보건 선생님들은 너무도 힘들어졌고
오늘 해보니 미술 교과도 쉬운 것 만은 아니었다.
행정실장님도 요새는 공사가 너무 많고 서류 및 일처리 과정이 복잡해서 지켜본바로는 쉽지만은 않았다.
이래서 역지사지가 중요한 법이다.
다른 사람의 어려움을 내가 다 알 수는 없다.
옆 사람의 아픔도 내가 온전히 다 알수는 없다.
필통 그림을 마치고 나면 물감이 조금 남는다.
몇 몇 아이들은 그것으로 실내화 커스터마이징에도 도전한다.
커스터마이징은 고객의 요구를 반영하여 제품을 독특하게 만들어주는 것,
일명 세상에 단 하나인 제품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 만든 가죽 필통도 유니크한 것인데
남은 물감을 활용해서 하얀 실내화에 원하는 무늬를 그려 넣는 것이다.
생활안전부에서는 싫어할 수도 있겠다만...
한쪽에는 세줄 무늬를, 다른 한쪽에는 명품 브랜드 무늬를 그려넣기도 하고
한쪽에는 고양이를, 반대편에는 강아지를 그려넣기도 한다.
필통에도 크리스마스트리나 눈, 선물 꾸러미 등 지금과 맞는 그림이 대세였지만
달이나 은하수를 그리거나 혹은 아주 드물게 명품 브랜드 로고를 그리는 학생들도 있었다.
아무려면 어떠냐...
자신이 그리고 싶은 디자인을 태블릿으로 찾고
최선을 다해서 그려보고
이니셜을 새기고
그리고 사진을 찍어 구글클래스룸에 올리는
그런 경험 자체을 하는것 자체로 훌륭했다.
다만, 기후 위기를 공부한 답례로 받은 선물인데
그림을 그리다보니 물휴지를 너무나 많이 사용하게 된다는 단점이 발생했다는 점이 안타까울 뿐.
물론 열심히 잔소리하여 모두 다 휴지통에 넣었지만 물감이 실험대 상판에 튄 곳이 몇 곳 있다.
아이들이 즐거워했으니 그 정도를 닦는 수고는 내가 기꺼이 하련다.
이글을 읽는 분들.
어느날 자녀가 멋지지는 않지만 만들었다고 소품을 수줍게 내밀면
마냥 감동의 눈빛으로 고맙다고만 이야기해주시라.
그들이 무엇인가를 보고 부모님을 떠올렸다는 것만으로도 그 또래에서는 흔치않은 것임을 알아주시라.
서툴지만 누군가를 생각하고 정성을 다했다는 것만으로도 그 물건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유니크하고 커스터마이징한 물건인 것이다.
내 인생이 그런것처럼...
요새 마음이 심난하여 더 일찍 일어나게 되고
오늘은 약속이 있어서 퇴근 이후 글을 못쓸지도 몰라서
어제의 뿌듯함을 기억하며 이 글을 쓴다.
자그마한 필통이 누구에게인가는 작은 기쁨이었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