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105
어떤 말보다 위로가 되는 한 끼
세상은 흉흉하고 나의 처지가 아무리 암울하여도
해야만 할 일은 해야 하고 그 와중에 하고 싶은 일도 생긴다.
해야만 하는 일 중 한 가지 염색이다.
친구들을 보니 은퇴 후 1년 정도 염색을 하지 않으면 자연스런 흰머리 할머니가 되던데
나는 아직은 그럴 시기가 아니다.
적어도 내년 1월말까지는 말이다.
10번을 끊어둔 미용실의 염색 쿠폰도 3번 정도 남아있다.
염색을 하고나서 친구가 말했다.
지난번에 못 갔던 돼지국밥집에 가겠냐고
본인은 지난번에 한 번 먹었는데 맛있었다고
오늘 다시 먹고 싶은 생각이 난다고...
꽤 걸어가야 하는데 갈까말까 고민했다. 날이 쌀쌀해서...
지난번처럼 예약 마감이면 헛걸음일텐데 고민했다. 바람이 차서...
그러나 그런 고민을 이길만큼 뉴욕타임즈에도 기사가 났다는 그 돼지국밥에 대한 호기심이 강렬했다.
그리고 왜 그곳을 가자고 하는지 친구의 마음을 조금은 알것도 같았다.
본인이 먹고 싶다 했으나 사실은 나를 먹게 해주고 싶은거라는걸 눈치챘다.
물론 평소의 나는 돼지국밥을 그렇게 즐겨하지는 않는다.
부산에 놀러가서도 먹은 기억이 한 번 정도밖에 없다.
돼지 그 냄새가 그렇게 개운하지는 않았고
빨갛고 진한 양념이 술국같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그런데 이곳은 맑은 돼지국밥이란다. 그것에 끌렸을 수도 있다.
브레이크 타임 끝나고 다섯시 오픈인데 4시 15분쯤 방문하여 테이블링 예약에 첫 번째로 기록 해두었다.
오늘은 먹을 수 있겠다.
다섯시까지 식당 입장을 기다리며 주위를 돌아다녀야 하는데 염색을 하고 나서인지 나의 컨디션 저조 탓인지 꽤 춥더라.
그럴때는 덜 추운 지하상가가 최고이다.
마침 꽤 큰 지하상가가 주위에 있었고
그곳에서 칫솔, 화장(아니다. 변장 수준이다)을 위한 퍼프솜, 아침 샌드위치를 포장할 종이 호일 그리고 주방 개수대에 남은 물을 깔끔하게 정리해줄 실리콘 스퀴지와 수세미를 샀다.
오늘 40% 할인을 해준다는 나의 최애 도너츠 가게에도 갔으나 이미 솔드 아웃이었다.
다들 어떻게 그리 소식이 빠른건지 조금은 아쉬웠다.
그리고는 돼지국밥집 맞은편 샌드위치 가게에서
내일 아침 아들 도시락용 샌드위치를 샀다.
아들은 이 시국에 내일 1박 2일 평창으로 워크숍을 간댄다. 이런 날은 도시락통을 가져가면 번잡하다.
깔끔하게 샌드위치가 최고이지만 나는 별로 좋아라 하지는 않는다.
샌드위치냐 도너츠냐 물어본다면(물론 어디 것이냐에 따라 다르겠으나)
열에 아홉은 도너츠를 선택할 것이다.
이 나이에 미팅하는 것도 아니지만 입을 크게 벌리고 먹어야 하는 샌드위치나 햄버거를 선호하지 않는다. 이제는 입이 크게 벌어지지도 않는다.
습관이다. 아니다 음식 스타일이다.
유명 맛집으로 소문난 돼지국밥집 때문에 주변 샌드위치 가게와 카페는 손님이 많았고(대기자들로 붐볐다.)
나는 주인이 권해주는 바질 치킨 파니니와 카야 토스트를 샀으며(렌지에 살짝 돌려먹으면 된다)
주변 빌라에는 그 맛집 식당 방문자들의 주차 및 소음 등으로 힘들다고 주의해달라고 표시해놓은 안내문이 여기 저기 붙어있었다.
드디어 기다리던 다섯 시에 오픈런으로 당당하게 식당에 입장했다.
오픈 키친 스타일로 회전 초밥집 형태의 단촐한 의자 10개짜리 식당이다.
파는 것도 돼지국밥과 만두 그리고 식혜와 소주 한잔, 맥주 한잔뿐.
단촐한 메뉴가 일단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작고 가지런한 물잔도 마음에 들었다.
먹을만큼 덜어먹게 되어있는 김치는 깔끔한 맛이었고(젓갈이 많지 않았다.)
고추지라고 써있는 쌈장도 막장도 고추장도 아닌 것에 얇게 썰린 돼지 수육을 찍어먹는데 유니크한 맛이다.
물론 돼지 냄새가 살짝 나는(발만 살짝 담갔다가 뺀 것 같은) 국물도 예사롭지 않다.
위에 살짝 얹은 파향까지도 잘 어울린다.
군더더기 없는 맛과 양과 풍미이다.
더할 것도 모자란 것도 없는 맛.
그리고 오랫만에 딱 내가 남기지않고 다 먹을만한 양이었다.
줄서서 기다려도 한번은 꼭 먹어볼만한 가치가 있는 맛집이 맞았다.
돼지국밥 한 그릇에 소주 한 병 비워야 당연한 술꾼들에게는 맞지 않는다.
추운 겨울날, 한 끼에 따스함을 담아둘 필요가 있는 오늘의 나같은 사람에게 딱 어울리는 밥집이었다.
내 상황을 잘 알고 있는 친구이니 아마도 나에게 오늘 이 음식을 꼭 먹여주고 싶었나보다.
고마울 따름이다.
나도 다음에 한참 후에 위로가 필요한 누군가에게 기회가 된다면 꼭 힘이 되는 음식을 나누고 싶다.
내가 오늘 받은만큼 말이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위로가 필요한 상태이다.
어떤 말보다도 위로가 되는 한 끼를 먹어야 할 시기이다.
왜 그런지는 다음주 정도나 되어야 이곳에 풀어놓을 수 있을것 같다. 시간과 위로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