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114

사과나무를 심은 오늘

by 태생적 오지라퍼

잊어버리고 있자고 애써 노력하고 있었으나

오늘 아침 문자를 받자마자 마음이 불안해졌다.

<검사 결과를 보러오세요.> 이런 문자였다.

지난 주 혈액검사와 위와 대장 내시경 검사를 했었다.

설마 남편처럼 위가 아픈 것은 아닐까?

남편이 위암이라는 이야기를 하자마자부터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위가 부은 것도 같고 꼭꼭 찌르는 것도 같았다.

이건 뭐 실시간 반응 수준이었다.

그리고 검사 날자를 잡고 나니

위도 아프고 장도 아프고

뒤편의 등까지도 아픈 것 같았다.

차마 남편과 아들 녀석에게는 티도 낼 수 없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검사를 받고

대장에 용종을 3개 떼어냈다는 이야기는 들었으나

의사 선생님의 표정과 이야기가 나쁘지 않았었다는 기억에 의존하며(마취가 덜 깼던것일수도 있다)

연말의 일주일을 버텼던 것이다.


오늘 갈까 아니면 내일로 방문을 미룰까하다가

어차피 정해진 운명이라면 오늘 가자고 마음먹었다.

그리고는 마치 내일이 없는 듯이(결과가 나쁘면 일할 마음이 나지 않을테니) 축제 업무를 준비했다.

많이 이른 감이 있지만

당일 활동 안내 명찰을 학급당 학생 수만큼

담임 선생님들께 배부하고

당일 부스에서 활동했음을 증명해줄 스티커도 동아리 담당 선생님들께 나누어드리고

전시물 안내 명찰을 준비하고

당일과 전날의 학생과 교사 간식을 확정짓고

찬조 출연해주시는 감사한 분들의 수당도 예산 범위가 맞는지 확인해보고

시험 문제 확인과 포장 작업도 하고(마지막 시험이라고 생각하니 더 마음이 쓰인다.)

그 사이 사이에 <지구의 자전과 공전 및 달의 위상 변화 부분> 마지막 정리 수업을 했다.

이제 내일 내가 갑자기 쓰러진다해도

기말고사를 보거나

축제를 운영하는 것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게 조치해두었다.

내일 지구가 멸망한다고 해도 오늘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바로 그 비장한 마음 자세로 말이다.


그리고는 결과를 보러 걸어가는

학교에서 삼분 거리의 병원까지 길은 매우 추웠고 그리 긴 거리였나 싶었다.

결과를 보러 들어가기 전 오분 정도의 대기 시간에 나는 병원 창문으로 보이는 을지로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마치 생의 마지막 을지로를 눈에 담겠다는 느낌으로다 말이다.(오늘의 표지 사진이다.)

저 평온하기 그지없는 사진 속에서 나만 비극의 주인공이 되지는 않겠지 하면서 말이다.

결과를 들으러 가는 진료실 문을 여는 순간까지 마음이 흔들렸다.

그냥 안듣고만 싶었다.

그래도 그럴 순 없지 않는가?

나에게는 힘든 암 치료를 옆에서 도와주어야 할 남편이 있고

행복하게 결혼을 시켜야 할 아들 녀석도 있다. 버텨야 할 명분과 의미가 충분하다.

힘차게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위염이 조금 있고(스트레스성이 분명하다.

남편의 위암을 알고나서 스트레스성 위염이 안생기면 이상한 것 아닌가?)

비타민 D 수치가 낮고(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주사를 맞기로 했다.)

혈당도 이제 관리할 필요가 있고(요새 사탕을 너무 많이 먹었나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대장의 용종 3개는 모두 양성이란다.

갑자기 힘이 난다.

새해 선물을 받은 셈이다.

내일은 더더욱 열심히 일을 하고

(축제날 급식비 제공, 협의회비와 간식비 결재, 기타 남은 준비물 신청 등)

다음 주 월요일 두 번째 항암주사를 맞을 남편을 위해 영양식을 준비하고

아들 녀석이 데이트하고 너무 늦게 들어온다고 잔소리는 절대 하지 않으리라.


저녁은

나는 어제 아들 녀석이 남긴 매콤돼지고기 볶음을 알배추쌈 싸서 먹고

(알배추는 새로 산 것이다.

나는 식구들이 남긴 음식만 먹는 옛날 어머니 스타일은 절대 아니다.)

아들은 조기 매운탕을(무가 없으니 감자깔고 청양고추 두 개 잘라 넣어 매콤 칼칼하게 만들어야지)

남편은 낫토하나 넣고 김가루 넣고 달걀 노른자 넣어(날 것 말고 익힌 것이다.) 비벼 먹으라 하고

감자국을 순하게 끓여주어야겠다.

밥 2/3공기 정도 먹는데 한시간쯤 걸린다.

밥 먹는데 힘이 많이 든다고 한다.

그래도 먹어야한다.

약도 먹어야 하고 주사도 맞아야 하고

암과의 싸움도 해야한다.

퇴근 후 운동을 하고 온다는 아드님과

약 먹는 시간 때문에 저녁 식사 시간을 조절하는 남편님에 맞추어

내 저녁 식사 시간도 이렇게 늦춰진다.

이제 이 글을 쓴 후 준비에 들어가면 시간이 딱 맞겠다.

약간의 위염밖에 없는 건강한 내가 맞춰줘야지 어쩌겠나.


저녁을 먹고 없던 힘도 나는지

내일 식사용 배추된장국도 슴슴하게 끓이고

남은 알배추 길게 찢어서

순대국 배달올 때 같이 온 새우젓을 넣어

겉절이도 조금 담가두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1월 6일에 아들 녀석의 건강검진이 기다리고 있다.

위랑 대장내시경까지.

그 결과를 볼때까지는 마음 놓을순 없겠다.

또 사과나무를 심을 수 밖에 없겠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1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