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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112

오늘의 계획은 이러하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점점 늦게 자고 점점 일찍 일어나고 있다.

학교에서의 일이 덜 힘들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게다가 더 나쁜 것은 악몽을 꾸어서 중간에 몇번씩 일어난다는 점이다.

(유아들은 배가 고파서 깨는 것이지만

나는 딱히 무엇때문에 깨는 것은 아니다.)

힘들면 일찍 기절해서 늦게까지 푹 자고 꿈도 꾸지 않는다.

고로 푹 잤다는 것은 그 전날 일을 많이했다는 것의 반증이다.


오늘은 2학년 기말고사 전 마지막 한 시간의 수업일이다.

나는 고사 전에는 가급적 시험 범위 내용을

한번씩 총정리를 해주고(이것이야말로 족집게 과외수준이다.)

마지막 한 시간은 자습 시간을 주고 있다.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내 생애 자습 시간은 항상 기말고사 전 마지막 한 시간이었다.

나는 자습 시간을 지도하는게 내가 수업하는 것보다 더 힘들더라.

그리고 웬만한 학생들은

기말고사 직전이 되어야만 공부할 생각이 들고

그때서야 너무 늦었다는 조급함이 생기고(아마도 그날이 오늘일 것이다.)

그래서 시험 공부다운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물론 전교 상위권인 몇 명의 학생은 다르지만...

오늘은 자습 시간이라고 공부할 것을 가지고 오라고 미리 안내까지 하였으니

가장 급한 과목 공부를 하는 것쯤은 눈감아 주려 한다.

교과목이 뭐가 그리 중요한가? 융합의 시대에 살고 있는데...

무엇이든 공부를 하려고 마음먹었고 실천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학습효과를 높여준다는 쇼팽의 피아노 연주곡을 조용히 틀어주었다.

그 효과인지 코앞에 닥친 날자때문인지 대부분 열공중이다.


아이들은 열심히 시험 공부 자습을 할테니

나는 그 시간에 내가 직접 리모델링하고

이제는 비워주어야 할 과학실 청소를 하던가

(우리 학교 최고의 핫플이다. 깨끗하고 세련되었다. 자화자찬이기는 하나 교실 리모델링 전문가이다.)

청소가 끝나고 나면 다음 주 수업을 준비하려 한다.

시험이 끝나고 학기말인데 무슨 수업을 하냐고 아이들은 눈이 동그래질지 모르지만(무조건 놀자고 한다. 막상 잘 놀지도 못하면서... 잘 노는 것도 매우 힘든 일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의미있는 수업을 진행하는 편이다.

특히 올해는 공식적으로 내 마지막 수업이 아닌가? 계획을 다 세워두었다.


첫 번째는 3학년도 만들었던 회로도 연결 키트 실험 수업이다.

만들기와 디자인 및 저항의 직렬연결의 의미를 되새기는 나의 종합 선물세트인 셈이다.

두 번째로는 AI를 활용한 영상 만들기 실습 활동이다.

많은 이미지 자료로 영상을 만들어보는 능력은 나중에 어떤 일을 하던지 도움이 될 것이라 확신하다.

친구들의 이쁜 사진으로 영상하나 만들어 놓으면 얼마나 멋지겠나 말이다.

이 수업을 위하여(노트북이나 데스크탑이 필요하다.) 나는 이미 AI교실도 빌려두었다.

세 번째로는 생각하는 힘과 문제해결력, 토의 토론 실습을 위한 마지막 조별 활동을 준비했다.

<재해 재난 상황에서 먼저 챙겨야 할 물품 선정하기> 프로젝트이다.

재해 재난에 대한 수업은 이미 3월초에 진행했지만

갑자기 닥치게 되는 상황에서 어떤 준비물을 왜 챙겨야 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들은 조금씩 다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집에 그 물품들이 있는지, 어디에 있는지도 확인하는 기회가 될 것이다.

재해 재난은 예고도 없고 대피도 짧은 시간에 진행되어야 하는데

평소에 연습과 준비가 되어있는 것과 아닌 것은 차이가 많이 날 수 밖에 없다.

1년간 함께 실험조를 했던 친구들과의 마지막 활동으로 딱이다.

우수조는 물론 간단한 먹거리를 상품으로 줄 예정이다.


이 세 가지 활동을 진행한 후

1년간의 활동이 모두 담긴 글 클래스룸을 보면서

올 한해 과학시간 활동 중 가장 좋았던 것과 힘들었던 것에 대한 설문을 진행한다.

내년부터는 비록 서울의 공립학교 교사는 아니지만

수업 활동에 대해서 학생들이 어느 부분을 어려워하고 흥미로워하는지를 알아보는 것은

매번 나에게 수업 방법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긍정적인 영감을 주었다.

이렇게 준비한 활동이 끝나고도 시간이 남는 경우는

조금은 오래되어서 학생들이 보지 않았음직한 과학 영화를 보여준다.

<마션>, <단테스 피크>, <투마로우>, <인터스텔라>를 준비해놓고 있으나

아마 한 편 정도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 사이 사이에 덕수제 밴드곡 떼창 연습도 해야하고

이화여대 합창단 아카펠라곡과도 친숙해져야 하고

태평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알아봐야 하고

현악 3중주팀의 바순과 비올라라는 악기에 대해서도 찾아봐야 하니 말이다.

아는 만큼 보이고 아는 만큼 들리는 법이니 말이다.


작가 무라카미하루키는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고

오후에는 달리기와 수영을 하는 루틴을 지킨다고 한다.

지금도 아마 그럴까? 이제 하루키도 많이 늙었을텐데...

이제 나는 그의 글을 읽다 못해 (한때는 홀릭 수준이기는 했다.) 생활 패턴까지 닮아가려는 것일까?

새벽 4시에 일어나서 글을 쓰는 루틴은 할 수 있을는지 모르겠으나

달리기는 티눈 때문에 쉽지 않고(한때는 꽤 달렸다. 단거리만)

수영은 젬병이다.(호흡이 되지 않고 물이 너무 무섭다. 발차기만 한다.)

하루키의 패턴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오늘 날이 많이 춥다고 하지만

나는 오늘 하루도 열심히 내 방식대로의 사과나무를 심을 것이다.

아침에 글을 쓰니 계획서가 되고

저녁에 글을 쓰면 소감문이 된다.

뭐 어떠랴.

이제 계획을 세울 나이도 소감을 말할 나이도 아닌 것 같다만...

아들 녀석이 결혼식에서 받아온 부케인데

드라이 플라워가 되어버려서

아직도 주방 한 켠에 놓여있는

저 사진속의 꽃과 같은 나이인데 말이다.

향기가 안나니 우리집 고양이 설이도 물어 뜯으려 하지도 관심을 주지도 않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버틸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언제 버려져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는

저 꽃과 같은 나이가 되었다.

나와 비슷해서 더더욱 버리지 못하는 것일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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