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 들어서 불편해지는 것들
노안과 그리고 기타 등등
늙어서 나이들면서 불편해지는 것들이 조금 있다.
많다고 하면 조금은 우울해지니 조금만 있다고 하겠다.
없다고는 도저히 이야기 할 수 없다.
먼저 누구나 다 아는 노안이다.
점점 글자가 안보이고 흐릿해지니
문서 작업을 할때나 톡을 볼 때 어려움이 생긴다.
요새는 노안을 방지하는 각막 수술을 하기도 하고(나는 무서워서 할 수 없다.)
돋보기 혹은 돋보기와 일반 안경 두 가지 기능을 함께하는 렌즈를 쓰기도 하는데
나는 렌즈를 바꾸면 어지러움을 많이 느끼는 편이라 이것도 쉽지 않다.
따라서 그나마 좋은 방법은 문서 작업을 할 때
글자 크기를 크게 하거나
아니면 아예 안경을 벗고 하는 방법이다.
내가 젊었을 때 선배들이 왜 그리도
안경을 머리 위로 올려 헤어밴드처럼 쓰고 계셨는지를 이제는 안다.
그렇지만 나는 헤어밴드처럼 안경을 쓰지는 못하겠더라.
그렇게 쓰는 사람들은 머리숱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나는 그렇게 머리숱이 많지도 않고 게다가 직모이다.
그리고 아직은 수업 중에 돋보기를 쓰지도 않았다.(돋보기를 아예 산 적이 없다.)
늙은 과학교사라는 것이 누가봐도 분명하지만
돋보기를 쓰고 교과서를 보는 모습만은
제자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나의 알량한 자존심이다.
디지털 교과서가 있어서 전자 칠판 화면에 띄우고 수업을 하면 되니 그것은 참으로 다행이다.
며칠 전 음식을 하다가
갑자기 가스가 끊어지면서
가스 제어기 속의 건전지를 갈아주라는
음성 메시지가 나왔는데 아들 녀석은 집에 없었다.
배가 너무 고팠고 저녁을 빨리 준비하고 싶어서
옆에 붙은 작은 건전지함을 간신히 열긴 열었지만(손톱이 짧은 나는 이것을 하다가 이미 지쳤다.)
아무래도 네 개의 건전지 연결 방법인
극 표시가 안보이는 거다.
미리 건전지를 봐두었어야는데 통을 여니 와르르 쏟아졌었다.
할 수 없이 안경을 벗고 개수대로 거의 올라가서 코를 박을 정도로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신기한 듯이 고양이 설이가 지켜보았고
두번만에 간신히 교체에 성공하고 났더니
화도 나고 온 몸에 힘도 쭉 빠졌다.
그래도 아들 녀석 힘을 빌리지 않고 성공했으니 다행이다.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으로는 손과 다리의 근육 힘이 줄어드는 것을 느낄 때이다.
특히 나는 손의 근육 힘이 약하다.
물론 젊었을때도 센 편은 아니었다.
아귀힘도 그렇고 손가락의 힘도 정교하거나 강하지는 않았다.
팔씨름에서 이겨본 기억이 별로 없다.
그러니 지금은 어떻겠나?
제일 신경질 날 때가
빨대의 비닐을 벗기거나(찢는 것은 더더욱 안된다. 가위로 자른다.)
햇반의 포장지를 열거나(요새 더욱 더 굳건해졌다. 커터 칼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캔을 따거나(이것도 젓가락의 힘을 빌린다.)
오일의 패킹을 열거나 돌리는 마개를 딸 때이다.(이것은 힘을 빌릴 기구가 없다. 아들의 힘을 빌리기도 한다.)
한 번에 열리지 않으면, 꿈쩍하지도 않으면,
신경질도 나고 서러워서 눈물도 찔끔난다.
급한 마음에 이빨로 돌려서 열어볼까 하는 마음도 순간 먹어보지만
그랬다가는 이빨이 부러질 확률이 매우 높다.
(손의 힘도 없는데 이빨의 힘은 있겠냐.
이빨을 다치면 시간과 돈이 정말 많이든다.)
가위로 되는 정도라면 정말 좋겠지만
잘못해서 칼을 쓰다가는 더 큰 사단이 날 수도 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자판에서도 자꾸 손에 힘이 안들어가서 받침이 따로 놀아 기분이 울적하다.
내가 한 때는 테니스를 하루에 3게임을 칠 때도 있었고
정교하게 후방 라인 선상에 떨어지는 로빙볼도 쳤던 사람이다.
다리의 근육 힘이 떨어지는 것을 느낀 이후로는 체육대회 날 달리기를 한다고 나서지 않았다.
단거리 달리기라면 자신있던 나였는데 말이다.
나의 가장 오래된 이어달리기는 지금으로부터 8년전이었다. 그때만 해도 날라다녔었다.
나의 마지막 PT는 2년전이었고
그래도 스쿼트와 그 뭐냐 3분 엎드려 뻗쳐 자세로 하는 오래버티기는 잘한다고 칭찬을 받았었다.
마지막으로는 점점 떨어지는 청력과
이에 비례해서 커지는 목소리이다.
아들 녀석은 왜 그렇게 크게 이야기하느냐고 하는데 내 목소리를 내가 잘 못듣기 때문이다.
답답하니 자꾸 목소리가 커지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원래 목소리가 큰 편이었다.
교사가 속삭이는 목소리여서는 안되는 법.
<최강야구> 응원을 가보았더니
목소리가 작은 편은 절대 아니더라.
나이 들어서 목소리가 커진 것만은 아니라고 주장하고 싶다.
청력은 확실히 약해졌다.
이비인후과에서 검사를 해보았더니 작은 소리에 해당하는 주파수를 듣는 능력이 떨어져있다더라.
약을 먹어서 올릴 수도 없는 능력이다.
나를 흉보거나 욕하는 소리가 잘 안들리고,
듣기 싫은 소리도 잘 못 듣게 되니
오히려 좋은 거라고 말도 안되는 위안을 삼아본다.
아직은 지하철 경로석쪽으로는 가지도 않고
앉을 생각도 하지 않지만
머지않아 나는 경로우대 지하철 티켓으로(공짜는 미안하기는 하다.)
월미도도 가고 영종도도 가고 아산 온천도 가는 그런 어르신이 될 것이 분명하다.
선배들이 가던 길을 그대로 따라가지 않겠나.
나이먹어서 불편하고 슬픈 것들은 점점 늘어나겠지만 순응하고 받아들이고(체념인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잘 구별하면서 지혜롭게 살아보련다.
오늘 학교로 이쁜 후배가 케잌 하나를 배달 시켜주어서(퇴직이니 울적함을 달래라는 센스있는 선물이다.) 급식을 먹은 후 디저트로 나누어 먹었다.
젊은 선생님들이 특히 좋아라했다.
그런데 나는 극강의 달달한 케잌을 이제는 살짝 피하게 된다.
단 것을 느끼는 미각이 이제는 작용을 잘 안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하나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좋다.
단 것을 자연스럽게 멀리하는 그런 날이 오다니 믿어지지 않는다.
사진 속 저 카페에서 먹은 달디 단 음료가
그렇게 맛나지만은 않은 그런 날이 오다니
정녕 믿어지지가 않는다.
이제 카페 자체를 잘 가게되지 않는다.
카페 물을 흐릴까봐 걱정도 되고
달달구리 음료수가 땡기지도 않는다.
곧 쌍화차나 생강차를 찾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데 글자는 안보이는데
먼지와 기름때는 왜 그리 선명하게 보이는거냐?
설거지 치다가
기름때에 쩔어있는 후드망을 기어이 떼어내
닦고있다.
선택적 노안인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