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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114

내 생애 마지막 시험

by 태생적 오지라퍼

세상은 가혹하다. 아니다 질병이 가혹한 것일 수도 있다.

지난 주 텐션 높게 할 일을 잘 처리한

나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을 때(정년퇴직하기에는 아깝다면서)

A형 독감이라는 철퇴를 내려주었다.

사실 독감 예방 접종을 하는게 맞다.

과학교사인 내가 수업하면서도 강조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재해 재난과 안전에도 예방 접종 강조가 나혼다.

그런데 내가 왜 접종을 안했는가 하면 5년전쯤의 아픈 기억 때문이다.

독감 예방 접종 주사를 맞고는 오히려 진짜 독감에 걸린 듯이 일주일을 꼬박 아팠었다.

그 이유는 알 것도 같다.

가을부터 겨울까지 늘상 알러지성 비염을 달고 살고 늘상 약한 감기 기운이 있는 상태에서

예방주사를 맞으니 시너지 효과가 나왔던 것이다.

그때의 그 한 방으로 나는 그 이후 독감 예방 접종을 무서워서 못하고 있었는데

이번에 또 한번 호되게 걸린 것이다.

그래도 이만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그렇게 생각이 바뀌는 것은 잘 안된다.


오늘 1교시는 나의 마지막 시험 문항이 배부되는 날이다. 그래서 힘은 1도 없지만 출근을 했다.

어제, 오늘 학생들은 물었다.

<시험 문제가 많이 어렵나요?>

<아니, 정리 수업 시간에 모두 다 알려준건데...>

그래도 중학교 2학년이 감당하기에

<동물과 에너지>, <식물과 에너지>, <지구와 달의 운동> 부분이 마냥 쉬울 수는 없다.

시험이 시작되고 20분이 경과되면 교실을 한 바퀴를 돌면서 질문을 받는다.

이런 저런 질문들이 있다.

대부분은 별 것 아닌 질문인데 오늘 한 명의 질문이 의미가 있었다.

학생들의 시선으로는 의도치 않은 킬링 문항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평소 킬링 문항을 출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부 많이 한 학생들이 헷갈려 하는 문항은 좋지 않은 것이라 생각힌다.

공부를 했으면 명쾌하게 풀 수 있는 그런 문항을 내려고 항상 노력했다.

함정을 파놓고 학생들이 거기에 빠지기를 기원하는 그런 문항 출제는 바람직하지 않다.

그 함정에 열심히 공부한 학생들이 빠지고 공부 안한 학생들이 운좋게 맞추고 좋아라 한다.

이건 로또 시장의 원리이지 학습에서 습득해서는 안되는 기법이다.

다시 한 바퀴 돌면서 헷갈리지 않도록 정리 설명을 모두에게 해주었더니(이런 것은 공개적으로 안내해야 한다. 수줍어서 질문을 못한 학생이 있을 수 있다. 칠판에 적어서도 안된다. 뒷자리에서 안 보일 수 있다. 나의 학생때 경험을 반영한 것이다.)

질문을 했던 그 학생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나의 마지막 고사도 마무리가 되었다. 고사는 문제가 없는 것이 최선이다.


그리고 병가를 신청한 내일과 모레 수업 대체 선생님들께 보강 관련 내용을 전달드리고

플리마켓용으로 구입한 행거 제작도 부탁드리고

집에서도 결재는 할 수 있으니 톡 달라고 하였다.

내일은 12시에 영상 및 조명 등의 축제 행사 업체와 현장 답사 및 의견 조율을 해야하고

훌륭한 지인이 보내준다는 플리마켓 기부물품도 받아야하니 잠시 학교에 들러야 한다.

그때 병원에 가서 수액을 한번 더 맞아야 할 것 같다.

질병에는 상대성 이론이 있다.

그 이전까지는 왼쪽 발가락 사이의 티눈이 제일 불편한 것이었으나

이제 그 통증은 아예 느껴지지도 않고

센 약을 먹어서인지 배가 아프고

어제 잠깐 정신을 잃고 쓰러졌을 때 부딪힌 왼쪽 엉덩이와 그 충격으로 허리와 목이 훨씬 더 아프다.

이것들이 다 나아야만 아마도 티눈 통증이 다시 자신의 소재를 알리게 될 것이다.

의사 선생님들이 물어보는 말이 아마 그뜻일 게다. <어디가 제일 불편하세요?>

지금은 배다.

아마도 위와 대장 내시경 이후 천천이 회복 중이었는데 센 약을 맞이해서 화가 났나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어제 쓰러질 때 다른 아무 것에도 부딪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대리석 상판에 부딪혔다면 나는 꼼짝없이 119를 탔어야 했을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아름다운 마무리가 이제 고작 2주반 남았는데 마지막 위기이다.

그래도 다음 주 축제 기간에 안 걸린 것이 어디냐.

목요일 전지훈련을 떠나는 야구부들과는 정식으로 빠이빠이 할 기회가 없다는 것이 아쉽지만

모두들 멋진 야구 선수가 되기를 기원하는 나의 마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야구부를 위해 그들은 알아차릴만한 시험 문항 중에 격려문구를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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