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115
먹기 위해 사느냐, 살기 위해 먹느냐
사람 일 참 한치 앞을 알 수 없다.
이 글감으로 이 전 글을 쓸 때 나는 약간의 위염만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나서는 A형 독감 확진이 되고나니
겉으로만 보면 항암치료를 받는 남편보다 더 아픈 몰골이다.
정신적으로도 그런 것 같다.
오늘까지 병가를 냈지만 그제도 어제도 학교에 나가서 업무를 이것 저것 처리하느라 한 시간 반은 있었고
그러고 났더니 다시 맞은 수액도 소용이 없는지 방전모드가 되어서 집까지 간신히 돌아왔다.
처음으로 어르신 우대석에 앉아서 눈을 못뜬 채 지하철을 타고왔다.
탑승 후 한 정거장 지나서 빈 자리가 생겼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지하철에서 주저 앉을뻔 했다.
바로 며칠 전만 해도 여유있게 서서 뚝섬한강공원 눈썰매타는 사람들을 찍었었는데 말이다.
A형 독감인 엄마와 2차 항암치료 중인 아빠 사이의 외아들은 의외로 굳건하다.
<미안하다> 했더니 (아프면 미안하다. 아픈 것을 보는 것은 속상하다.)
<나는 엄마, 아빠가 사이 좋아 보여서 보기 괜찮다.>라고 오히려 위로를 해준다.
아마도 서로에게 무한 잔소리를 해대는 것이 나쁘지 않아 보였나보다.
아들 녀석도 나를 닮아서 T임에 틀림없는데
나보다는 더 따뜻하고 더 진중하고 더 잘 참는다.
다행이다. 이런 괜찮은 녀석을 빨리 데리고 가주었으면 좋겠다.
어제 제일 아팠던 배는 좋아진 것 같으니 이제 무얼 좀 먹어봐야겠는데
먹고 싶은 것은 사실 하나도 없다.
그래도 항암주사를 맞고 온 남편을 먹여야 되겠다는 일념에
내 생에 거의 처음인 창작 요리를 시도하는 중이다.
간은 아주 약하게 그리고 절대로 자극적이지 않게 무설탕으로 말이다.
양배추, 당근, 버섯, 파, 마늘, 양파 넣고 소고기 베이스로
샤브샤브 형태인지 수프 형태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뭉근하게 국을 끓인다.
먹는데 시간은 오래 걸리지만 그래도 다 먹어주는 남편이 고맙다.
그것도 못 먹으면 걱정이 더 커질텐데 말이다.
그리고는 정작 나는 먹지 못한다. 아직은 속이 울렁거려서이다.
김치만 조금 씻어서 하얗지만 그래도 간은 조금 있는 상태로 순두부국을 만들어 주기도 한다.
감자국, 황태국, 소고기 미역국, 콩나물국, 무국 등 흰색이 나는 국이라는 국은 모두 준비한다.
조금씩 한 끼 분량으로 끓여서 소분해주기도 한다.(아산 공장에 내려가서 먹으라고)
아침에는 생과일이나 야채를 여러 개 섞어서 주스나 슬러시 형태로 주기도 하고
좋아하는 양배추는 당근, 혹은 무우나 감자, 각 종 야채와 함께 살짝 볶아서 준다.
여하튼 지금까지는 항암 중인데 체중이 빠지지 않고 쪘다니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아픈 와중에도 남편 식사를 차리고 챙기고 있고
나에게 A형 독감이 옮을까 마스크를 집에서도 꼭 끼고 있으니
참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다.
어제 남편은 미뤄둔 회사 일을 하러 내려가고
나는 오후에서야 긴장이 풀린 듯 깊은 잠을 잤고
얼마나 잤는지 막내 동생과 아들 녀석의 안부톡이 와 있을 정도였다.
서로 떨어져있는 주말까지 서로의 몸을 잘 보호하기로 남편과 굳은 약속했다.
그러려면 이제 내가 먹어야 할때인데 아직은 기운이 1/10도 나지 않는다.
A형 독감도 이리 무서운데 암세포는 어떻겠나 싶다.
오늘 아침 출근은 안하지만 정상적인 시간에 일어나서
아들 녀석의 도시락을 쌌다.
딸기 조금, 감 조금, 귤 두알 그리고 사왔던 빵 조금, 닭가슴살 두 개
그리고 나는 딸기와 감 남은 것을 몇 개 일단 입에 넣어본다.
맛이 조금은 나는 듯 하다.
어제 아들이 사다 준 앞 식당의 갈비탕 남은 것을 데워서 조금 먹고
약을 먹고 쉬다가
점심에도 무언가를 먹고 약을 먹고 쉬고
저녁에는 입맛 올릴 무언가를 배달시켜 먹는
하루 온전한 병가일을 보내야겠다.
내일은 일이 많은 날이고 오늘도 그 사이에 온라인으로 처리해야할 무언가는 꼭 있을 듯 하다.
괜찮다. 아마 그 일을 하면 먹을 것이 더 땡길 수 있다.
그래도 체중도 많이 안 빠졌다. 다행히...
그런데 이상하다.
아프면 그렇게 먹고 싶던 복숭아 통조림을 황도, 백도 하나씩 사두었는데 영 먹고 싶지가 않다.
너무 단 것에 대한 기피증이 생겼나보다.
남편이고 막내동생이고 모두 혈당을 신경쓰고 있으니 나도 덩달아 그런가 보다.
저 캔 두 개는 누구에게인가 기증해야겠다.
이 글을 썼다는 것은 생존신고의 의미이다.
너무 아프면 글 쓸 생각조차 나지 않더라.
나에게 힘을 줄 음식이 반짝 생각났으면 참 좋겠다.
나도 눈썰매 탈 정도는 아니더라도 내일 출근할 정도의 힘이 생겼으면 참 좋겠다.
(이 글을 올리고 맨밥을 조미김에 싸서 우겨넣고 있다. 넘어간다. 다행이다. 살기 위해 먹는다는 말을 극히 싫어하지만 당분간은 그런 모드로 버티는게 맞다. 점심때는 순두부에 밥 한숟가락 말아 입에 밀어넣었다. 잘 하고 있다. 남편도 아마 비슷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