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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지않는 혼밥 요리사의 비밀레시피 124

길고 긴 명절기간 동안 나의 동지가 되어준 것

by 태생적 오지라퍼

지난주 토요일부터 사실상의 명절 휴가인셈이었다.

엄밀하게 말하면 금요일 퇴근 이후이다.

이렇게 오랜 기간 명절인 경우도 흔하지는 않은 듯 했지만

사실 나에게는 명절인지 방학인지 퇴직인지 분명한 구분을 안되는 상태라고 이미 고백했었다.


토요일은 티눈 치료와 동생네와의 식사

그리고 친정 부모님 납골당 방문과 작년 졸업생 이쁜 제자들과의 식사로

일요일은 설음식 준비, 청소, 세탁과 남편 맞이로

월요일은 남편 항암과 나는 후배들과의 브런치 및 연말정산과 퇴직 연금 신청 등으로 바쁘게 보냈다.

화요일부터는 밥 차리고 밥 먹고 치우고

아픈 허리를 핑계삼아 누웠다가

다시 밥 차리고 밥 먹고 치우고 누워버리는

그런 일상을 보냈다.

수요일 점심 시어머님을 방문해서 장소가 바뀐 것 빼고는 그날이 그날이 되었다.

수요일 시댁 방문 후 남편은 그곳에 남아서 어머님과 옛 이야기를 실컷 나눈 후

오늘 오후 공장으로 내려갔다.


일요일은 꽃게탕

월요일은 야채 샤브샤브와 닭갈비볶음

화요일은 바나나+망고 쥬스와 전복죽, 얼갈이배추된장국과 당근호박볶음, 버섯국과 가자미무조림

수요일은 바나나+딸기 쥬스와 닭죽, 오색나물과 소고기무국과 버섯불고기와 가자미구이, 닭갈비양념볶음밥과 달걀국

목요일은 바나나+한라봉 쥬스, 닭가슴살구이, 삼겹살 수육과 얼갈이 김치, 잔치국수와 김치찜


이렇게 나의 명절은 먹거리 준비와 정리로 장렬하게 끝이 났다.

오늘, 그 명절 기간 동안 나와 함께 한 유일한 동지를 그려보았다.

바로 위에 그린 그림이다.

콩나물 꼬리를 딸 때도

시금치를 다듬을 때도 함께였고

남편의 느린 식사 템포를 맞추기 위해서

식탁에 앉아있는 동안에도 함께였고

생각보다 너무 사이즈가 큰 얼갈이배추가 배송되어 할 수 없이 김치를 담을 때도 함께였다.

고맙다. 유투브 알고리즘이여.

한번 틀어놓으면 계속 쉬지않고 이어진다.


다른 볼만한 프로그램은 없을까

열심히 채널을 돌려보던 아들 녀석이 선택한

영화나 드라마를 볼때면 남편과 나는

똑같이 자동으로 이런 저런 잔소리가 나왔다.

현실에 맞지않는다는 등

주인공이 너무 오버한다는 등

대본이 너무 진부하다는 등

드라마나 영화라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한 두 사람의 반응에

아들녀석은 당황한 듯 허허 웃었다.

그런 잔소리 없이 우리 셋이서 그냥 볼 수 있는 프로그램은 오로지 <최강야구> 뿐이었다.


그리고 오늘 오후 명절 기간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아들 녀석과 잠시 산책을 하고(바람은 안 불었는데 제법 추웠다.)

오늘까지 사용 기한인 쿠폰을 사용하기 위해서 커피와 생크림 카스테라를 먹고

저녁으로 포장마차 스타일의 메뉴와 함께

소주 한 잔까지 먹고 나서는

<대학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기 시작했다.

그 프로그램에 나오는 영재급 대학생들의 활동을 관찰하는 일도 재미있었고(누가 전공 아니랄까봐 표가 난다.)

제법 오랜만에 머리를 굴리면서 해법을 찾기 위한 건설적인 대화를 나누었다.

수준 높은 문항에 감탄하기도 하고

그 문항을 풀어내고 전략적으로 접근하는 그들에게 놀라기도 하면서 말이다.

먹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머리를 쓰는 것일 수 있다.

적당하게 머리를 쓰면서 맛있는 것을 먹는 것이

어쩌면 최고의 행복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해준 이번 명절이었다.

그리고 너무 긴 명절은 오히려 건강에 좋지 않다는 것도 말이다.

계속 먹기만 해서 살도 너무 찌고

몸이 둔해짐도 느끼게 되고

지극히 단순한 생활 패턴으로 인해

정신이 몽롱해질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 분명하다.

이번 명절이 나에게는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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