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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내가 꿈꾸는 집

하루가 몹시 길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어려서부터 나는 인형 놀이나 공주옷 그리기 대신

내 방 꾸미는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네모칸을 그려놓고

이쪽으로는 침대, 반대쪽으로는 책상

그리고 이쪽에는 화장대

어릴 때 생각으로는 이것밖에 놓을 것이 없었는데

그래도 매번 그리고 또 그리는 일이 심심하지 않았다.

아마도 나 혼자만의 방을 기원하는 방법이었을 것이다.

대학생이 될 때까지 나는 방을 동생과 함께 썼다.

책상 위나 주변이 깔끔해야 공부가 제대로 되는

이상한 징크스와 루틴 때문에

동생과 많이 다퉜던 것도 같고

그래서 아마도 틈이 날때는 그런 그림을 그리곤 했나보다.

잠시 건축공학과를 갈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으나

나의 태생적 똥손을 깨닫고 금방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다행이다.


가끔 보는 TV 프로그램 중에

특이한 집을 탐구하거나

이사갈 집을 구해주는 프로그램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가고

집은 아니었지만

학교 과학실 리모델링이나

미래학교 리모델링 프로젝트를 하면서

대리 만족을 하고 지냈다.

이제 정년퇴직을 하고

어느 곳에서 어떻게 나의 노년을 보낼까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다가온다.

당분간은 시어머님 집정리(양로원으로 가시기로 대단한 결정을 내리셨다. 버려야 할 짐이 태산이다.)

남편의 항암 뒷바라지가 중점이 될 것이나

둘 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면

나와 독립하는 아들 녀석의 거주지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올 것이다.

남편의 희망지는 천안아산 지역이다.

나도 기본적으로는 동의한다.

비싼 서울에 있을 이유는 없다.


사실 개인주택도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고

모델하우스도 보러 가고 자료들도 찾아보았지만

아무래도 관리의 어려움이 발목을 잡는다.

(이제 나이가 더 들어가니 무섭기도 하다.)

내가 원하는 집은 크기가 절대 크지 않고(청소기가 청소를 해준다지만 그래도 더러운 것을 참기 힘들다.)

화장실은 2개 이상이어야 하고(남편의 화장실 사용 방법이 처음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각자의 방이 하나씩은 있어야 하며(나의 거친 잠버릇에 서로의 꿀잠을 위해서이다.)

아들 녀석이 가끔 집에 왔을 때 쉬어야 할 방 하나쯤이 더 있었으면 한다.(와서 자고갈 일은 절대 없을 것이지만 말이다.)

사실 2층집 말고 단층집을 선호하지만

그래야 음식을 하면서도

한 눈에 모든 것이 파악이 되겠지만

고양이를 위해서는 계단이 있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기는 하다.

한옥 느낌이 드는 집도 선호하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단열과 난방이다.

븕거나 회색 느낌의 벽돌집이나 아예 시크한

징크나 노출 콘크리트 외부도 좋아라 한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지하철 이동을 좋아하니 역세권이 최고이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하는 집을 구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겠지만(돈만 넉넉하다면 쉽겠지만)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얻을 것은 얻는 내 생애

마지막 집을 꿈꾸고 있다.


그나저나 오늘 오전은 일상처럼 학교에서 보람차게 보냈다.

(연수용 PPT를 완성했고

보내야 할 메일도 다 처리했고

마지막 재직증명서도 출력했고

친정아버지 호국원 이장 신청 처리 과정 문의도 했고

조카 녀석 코딩 공부 자료도 포워딩했고

금요일 후배들과의 모임 식당 예약도 처리했다.)

그리고 맛집 오픈런에 성공해서

쌀국수 비슷한 칼만두와

불맛 나는 김치볶음밥도 먹었고

고등학교 배정을 받은 졸업생들 이쁜 얼굴도

한번씩 더 보고 축하의 이야기도 건네주었는데

(모두 반가워해줘서 고마웠다.)

집에 와서 오후가 되니 시간이 너무도 안간다.


서툰 그림도 그렸고

브런치 글도 한 편 썼고

이제는 말라버린 꽃 정리도 했고

고양이 설이의 눈꼽도 닦아주고

좋아라하는 츄르도 하나 주었는데

이제 시간이 세시 반밖에 안되었다니...

수업을 하면 정신없이 후딱 세시 반이 되는데

명절은 그렇다고 쳐도 오늘도 시간이 너무도 안간다.

꿈꾸는 집과 방마다 가구 배치 그림이나 그려야 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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