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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날

집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으련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이런 날은 나에게는 정말 드물게 찾아온다.

정말 아무 일정도 없고(이번 주 유일한 날이다.)

아침에 일어나보니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왜 그런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추워진다는 날씨 때문일 확률이 매우 크다.


추운 것을 제일로 싫어하는 이유는 어려서의 경험 때문일게다.

그때는 왜 그렇게 추웠었는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추웠던 기억만 있고 더웠던 기억은 별로 없다.

선풍기 한 대와 차가운 수박으로 충분했었던 것 같다.

그러니 나의 체감상으로도 지구온난화가 심해진 것은 맞다.

얼마나 내가 추위를 탔는지는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여러 차례 귀가 빨개지고 가렵던 동상의 기억이 분명하고(그때는 후드티나 모자를 왜 안 쓰고 다녔을까나, 아니다 귀마개를 했던 기억도 있다.)

교실에서 제일 추운 공기는 아래쪽에 모이게 된다는 대류에 대한 개념도 체감으로 알게 되었고(발가락이 너무 시려웠다. 양말을 기본으로 2개씩 신고 다녔다.)

학교 쉬는 시간마다 난로 옆으로 달려가서 꼬부라지는 손을 녹이곤 했고(고약한 냄새쯤은 참을 수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랫목으로 달려가서

몸을 오분 정도는 녹여야만

밥을 먹을 수 있을 정도로

나는 추위에 절대적으로 취약했다.

지금도 비슷할것이다.

따라서 추운 나라로의 여행은 꿈도 꾸지 않는다.


교사가 되어서도 학교는 여전히 추웠고(지금도 난방 온도에 제한이 있다.)

특히 매번 사람이 상주하고 있는 것이 아닌 과학실의 경우

물이 얼어붙어 수도가 터지는 일도 빈번했고(추위가 오면 수도를 아예 잠그고 물을 이용하는 실험은 하지 못한다.)

다른 교실보다 2℃ 이상은 기온이 낮아서

겨울철 실험 수업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따라서 겨울 내 출근 루틴 중 가장 첫번째는 과학실에 난방을 켜두는 일이었다.

오늘 입춘 맞이 한파 주의보라고 계속 알람이 오니

나같은 추위 절대 회피자는 아무것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 것이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런 날 내가 주로 선택하는 일은 문서 작업이다.

퇴직을 앞두고 꼭 해야하는 문서 작업이 뭐가 있을까만 오늘을 연구 계획서 작성의 시간으로 보낼까 한다.

생각해보니 연구란 꼭 교사여야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5년전 쯤부터 다양한 연구활동을 함께 하던 연구팀도 있으며

여러 단체에서 소정의 연구비를 지원하는 프로젝트 신청서 마감은 대부분 2월이다.

늘상 해오던 것을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시도해보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이틀전에 문득 하였다.

지금까지는 내가 학생들과 수행하는 활동을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다면

이제는 나는 서포트를 하고 다른 후배 연구팀 교사들이 주죽이 되어 활동하는 내용을

기록하는 연구를 하면 될 것이 아니던가?

왜 나만 주축이 되어야 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생각을 바꾸니 (역시 마음먹기 달렸다.)

다시 연구계획서를 작성할 생각에 신이 났다.

물론 계획서만 제출한다고 모두 다 선정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연구계획서 작성에는 사실 긴 호흡의 시간이 필요하다.

작성하다가 중간에 다른 약속이 있거나 다른 일을 하면 걸리는 시간이 배가 된다.

논문 작성과 같은 유형의 일처리가 필요한 법이다.

오늘이 마침 딱 그것을 처리할만한 시간적인 물리적인 여유가 있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 연구팀에 이번에 막 박사학위를 받은 멋진 후배교사가 있다는 것도 큰 힘이 된다.

무언가 해야 할 일이 주어지는 것과 아닌 것의 큰 차이는 이미 많이 경험해보았다.

나는 자발적으로도 무언가를 하려 하는 스타일이지만

무언가 미션이 주어질 때 그것을 잘해내고자 더욱 열심히 하는 스타일이다.

오늘은 연구 여행을 떠나는 서울역 입구에 서있는 날인 셈이다.

그 묘한 설렘과 아직은 꽤 괜찮은 두뇌의 움직임을 좋아한다.

추운 오늘 하루 집에서 꼼짝않을 예정이다.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지 않겠지만

나는 또 격렬하게 무언가를 시도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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