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친해지거나 능숙해지지는 않은 듯 하다.
약속이 없는 어제 하루 집에서 연구계획서를 작성하는게 주된 미션이었지만
뒤돌아보면 해야 할 집안일이 보여서 오래 집중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다들 일을 하기 위해서 노트북을 싸들고 카페를 찾아가는 모양이다.
평소에는 안보이다가
왜 일만하려하면
거실 바닥에 더러운 부분이 보이고
주방의 물때도 유달리 커 보이고
그릇들은 밑바닥이 다 더러워 보이고
화장실 변기는 끈적끈적해 보이는 것인가 모르겠다.
아들 녀석 눈에는 보이지도 않는다는 것들이
늙고 시력도 나쁘고 노안인 내 눈에는 커다랗고 선명하게 보이는것이냐.
할 수 없다.
연구계획서 작성을 뒤로 미루고 일단 집안일을 시작해본다.
먼저 냉장고 잔반 정리이다.
자잘하게 남은 반찬은 과감히 버리는 것이 최고이다.
플리마켓 물품은 잘도 정리하면서 왜 반찬 정리는 고민을 하는가 모르겠다.
아들 녀석이나 나나 한번 맛나게 먹으면
다시 먹지 않는 스타일인 것을 잘 알면서 말이다.
근처에 동생이나 지인이 같이 사는 삶이 노년에 가장 바람직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알겠다.
반찬도 나누어 먹고 먹거리도 소분해 먹으면 경제적이면서 효율적이게 된다.
가스 렌지와 전자 렌지는 왜 그리도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것이냐.
매번 사용하고 정리한다고 하는데도
기름때나 물의 흔적들이 웬만한 전문가들 솜씨 아니고서는 깨끗이 없애기가 쉽지 않다.
신기하다.
바쁜 평소에는 그냥 넘어갈 것들이 이제는
매의 눈이 되어서 보인다.
보이는데 안 치우기는 더 힘들다.
주방 정리를 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고 들어왔더니 훌쩍 점심시간이 되었다.
청소기를 돌리는데 소음이 지나치게 발생한다.
아래 밸트를 자세히 살펴보고 잘 만져준다.
우리 집 청소기에 주로 수거되는 것은 고양이털이 90%이다.
기본 청소기를 돌린 후 물걸레 청소기를 돌리는데
물걸레 청소기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나 매우 예민하다.
그리고는 뭐라뭐라 안내 멘트가 많이 나온다.
외출 할 때 청소기를 돌려놓고 나가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물걸레 청소기는 집에 있을 때 돌려야 할 것 같다고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안내 멘트에 집중하면서 퇴직 기념으로 받았던 많은 꽃들을 정리한다.
누가봐도 내가 물걸레 청소기의 노예가 된 듯한 모양새이다.
세탁기는 일주일에 두 번 정도 돌리게 되는데
아들 녀석은 고 퀄리티의 세탁 상태를 희망한다.
냄새도 향기롭고 건조 후 상태도 뽀송뽀송하기를 희망하니
그러러면 집에 있을 때 세탁을 하고 재빨리 건조기로 올려야만 한다.
세탁기를 돌리고 한참 후에 건조기를 돌리면
그 사이에 약간의 세탁기 특유의 냄새가 배게 된다.
이제 세탁과 건조를 하나의 통에서 해결한다는 신제품이 나왔다는데
그것을 쓰면 이런 고민과 번거로움은 해결이 될런지도 모르겠다.
고로 청소이건 빨래이건 집안일 모든 것에는 주부의 관심과 손길이 꼭 필요한 법이다.
자동으로 완벽하게 처리되는 것은 없다.
나는 내가 할 일을 아직도 펜으로 기록해두는 아날로그인이다.(아들 녀석이 신기한듯 쳐다본다.)
핸드폰에 메모하는 습관도 가끔은 있지만
어딘가에 글로 할 일을 적는 순간
내 머릿속에 그 일의 매뉴얼이 정확하게 각인되는 것 같은 느낌이 아직은 크다.
그리고 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여서 글을 쓰는 과정이 치매 예방에 도움이 되리라고도 믿는다.
그래서 치매이셨던 우리 엄마도 기억을 되살리려 일기를 쓰려고 부단히 노력하셨던 것일게다.
엄마가 삐툴삐툴 쓴 일기장을 본 날
나는 많이 울었었다.
<내가 왜 이럴까?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디를 못 찾아갔다.
또 길에서 헤매었다.>
이런 내용이 주가 되었던 그 일기를 쓰면서
엄마도 마음속으로 피눈물을 흘리셨을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바른 글씨 쓰기 대회를 휩쓸던
명품 글씨 소유자였던 나도
이제는 손에 힘이 없어져서인지
글씨가 점점 삐툴빼툴해진다.
어제 할 일에 분명히
집안 청소 및 빨래, 냉장고 및 주방 정리하기는 써놓지도 않았는데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집안일의 굴레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다.
그래도 뿌듯함은 있다.
여하튼 연구계획서는 50% 정도 밖에 완성하지 못했고(핑계거리를 찾았다. 집안일 때문이다.)
내일 오후에 학교에 잠시 나가서
관련 자료와 초안을 프린트하여
아직도 조금은 구시대적인 방법으로 살펴보고
수정 및 보완을 할 예정이다.
3층 과학실에 붙여놓았던 풍선도 정리할 겸
교사 전보이동이 있는 날이기도 해서
잠시 학교에 들렀다가
저녁 약속에 가면 될 것 같다.
내 자리에 어느 선생님이 발령받아 오시는지 알아보고
아는 후배면 날을 잡아 인계인수도 하려 한다.
집안일이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처럼 멋진 마무리도 끝이 없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