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이 따뜻한 사람 만나기
입춘이 지났는데 최강 추위가 몰려왔다.
꼭 그렇더라.
이제 추운 것이 어느 정도 지나갔나보다
그렇게 마음이 조금 느슨해지면
아직 끝난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듯이 추위가 거세지더라.
하필 오늘 나의 정년퇴직을 축하 혹은 위로해준다고
강서구, 영등포구, 도봉구에 사는 지인들이
나와 가까운 성동구에서 만나기로 한 날인데 말이다.
추워도 너무 추운 듯 하여 만남을 연기할까 하였으나
다시 날 잡는 것이 더 힘든 일이라 강행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추위 때문에 근처 나들이는 생각도 할 수 없어서
제일 가까운 내가 조금 먼저 가서 식당을 찾아보고
바로 옆 전시의 수준도 살펴보고 차를 마실 곳도 알아보았다.
지하철역과 그 지하 공간에서 모든 것을 해결해야만 했다.
점심은 몇 종류 식당 중 모두가 먹어본 경험이 없는 홍콩 음식점으로 결정했다.
고기와 새우가 들어간 딤섬과
또 간이 잘 배어있는 고기와 새우가 올라간 덮밥과
홍콩 특유의 오이무침을 나누어 먹었다.
오래된 지인들과는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시켜서 나누어 먹는 재미가 있다.
2년전 선배 퇴직자에게 내가 축하밥을 샀다고
오늘은 나에게 꼭 밥을 사주겠다 한다.
그 밥을 사주러 이 추운 날 그 먼길을 와준 것이다.
세상에 공짜란 없고 기브 앤 테이크가 맞다.
가끔은 기브의 양이 테이크의 양보다 더 많다고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는 말자.
그 반대의 경우보다 낫다. 마음이 더 편하다.
오늘은 내가 산 밥보다 훨씬 맛나고 비싼 밥을 얻어 먹었다.
식사 후에는 내가 먼저 봐 두었던 전시장 티켓을
답례로 선물하였다.
내가 먼저 전시를 본 이유가 있다.
전시를 보는 나만의 빠르기가 있는데
각각 다른 속도를 맞추어서 같이 관람하는 것은
양보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멋진 가구와 집의 구조를 중심으로 다양한 그림을 구경하는 관람에는
개인의 흥미도에 따라 관람의 빠르기가 다를 수 밖에 없다.
그 개인의 속도를 맞추어서 함께 보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나는 전시 관람은 혼자 하는 편이다.
지인들이 전시 관람을 하는 동안 나는
그 지하 공간의 다양한 상점을 구경했다.
같은 사이즈의 멋진 종이 가방 세 개를 사고 싶었으나 소품샵에 마땅한 것이 없었다.
아주 작은 사이즈(여름, 2박 3일까지는 버틸 수 있을 용량의)의 여행용 캐리어는 마땅한 것이 있었으나
배경 그림이 너무 젊은이 취향이어서 몇 번을 망설이다 포기했다.
너무 귀여운 것은 이제 절대 어울리지 않는다.
그리고는 다양한 식재료와 주방 소품을 파는 곳에서
(연어 스테이크를 하나 살까 말까 잠시 고민하긴 했다. 요새 식재료 욕심이 과해졌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씩을 나누면서
노년기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에 대한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제는 나이를 먹을대로 먹어서
누구는 손자를 보기 직전이고
4명 중 2명은 남편이 와병중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씩씩하게 이겨내보자
그런 조금은 슬픈 이야기를 나누면서
우리의 너무도 젊었던 30대 초반의 학교 시절이 떠오르는 것은 무엇때문일까?
그 때의 우리는 반짝 반짝했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녹이 슬어가는 일만 남은 것 같아
조금은 서글프기도 하다.
지금보다 많이 따뜻해지고 봄꽃이 만발하는 날,
오늘 산책하지 못한 서울숲에 다시 한번 꼭 같이 오자는 약속을 남기고 1년만의 모임을 마무리하였다.
언젠가 오늘을 회상하면서 그때는 한창일때라고 되돌아보는 날이 올 것을 알고 있다.
최강 추위를 이겨낼 수 있는 방법 중 한 가지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들과 공유하는 시간의 힘이다.
그리고 그것은 서로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을 주는 안내판 같은 것이다.
오늘 전시에서 가장 멋진 것은 위 사진 속의 안내판이었다.( 내 생각이다.)
절대 관람 순서를 헷갈리지 않게
역주행이란 있을 수 없게
자세한 안내판이 마치 하나의 작품처럼
곳곳에 놓여있었다.
앞으로의 내 인생에도 누군가가 멋진 안내판 노릇을 해준다면 조금은 수월하게 늙어갈 수 있을텐데...
아무리 맨땅에 헤딩하기가 나의 취미생활이라해도
나도 노년이라는것은 처음 만나는 것이다.
뭐든지 처음은 낯설고 겁이 나기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