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늙은 과학 교사의 수업 이야기 122

학교를 옮긴다는 것의 무게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늘은 서울시교육청 교사들의 정기전보 발표날이다.

대부분 5년에 한 번씩 학교를 옮기게 된다.

학교를 이동하는 일은 교사 최대의 스트레스이자 새로운 도약과 출발의 계기가 되기도 한다.

마치 새로운 동네로 이사를 가는 것과 비슷하다.

익숙한 것으로부터의 이동이므로

불안하기도 우울하기도 하고

짐을 버리고 싸면서 새로운 다짐도 하고

여하튼 이사와 매우 유사하다.

자율적인 동기 부여는 아닐지 모르지만 타율적으로는 다시 셋업할 수 있는 기회가 되는 것은 틀림없다.

그리고 이동하는 학교의 스타일, 학생들의 수준과 학부모님들의 성향까지

이전 학교와 비슷한 것은 1도 없는 새로운 환경에 부딪히게 된다.

그래서 새로 이동한 첫 해 3월은 유난히도

춥고 배고프고 힘들다.

그리고 <이 학교는 왜 이래요?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나는 대학 졸업식날 신규교사 임용을 받았다. 그러니 하루도 백수로 있었던 날은 없었던 셈이다.

첫 학교는 양천구 신월동의 언덕 위 학교였다.

버스 정거장에서 내려서 경사로를 올라가다가

학교 정문이 나타나면 급 경사길로 바뀌는 그 곳에서

나는 교사 인생을 지속시켜준 멋진 제자들을 만났다.

그들을 안만났더라면 나는 일찍 다른 일을 찾았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교사로 만들어준 녀석들이다. 고마울 따름이다.

그들과의 에피소드는 업무와 교육에 서툰 나를 항상 웃게 만들어주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결혼을 했고

하나뿐인 아들을 낳았으며

처음 차를 운전하여 그 언덕길을 올라갔고(엄청 무서웠다.)

그 학교를 떠나는 날 많이도 서운했었다.


두 번째 학교는 그 당시 양천구 최고의 엘리트가 모여있는 학교였다.

평지에 있는 학교라서 좋았고(육아를 하느라 늘상 시간에 쫓겼다.)

수업 내용을 잘 이해하고 쫓아오는 학생들의 수준에 좋았고(수업 준비 시간은 늘어났다만)

알아서 공부를 열심히 하는 그들을 격려하는 것은 잘 할 수 있었다.(학원 수업에 지친 표정들이 많았다.)

그리고 하나뿐인 아들을 육아하면서

내 아들도 저런 멋진 학생들이 될 것이라는 높은 꿈도 꾸었었다.(쉽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세 번째 학교는 나의 교사로서의 정체기였다.

학습 의지가 높지 않은 그들을 머리로는 조금은 이해했으나(주변 환경이 힘들었다.)

가슴으로는 이해되지 않아서(그럴수록 나를 위해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왜 저러고 있나하는 생각이었다.)

화도 났었고 지치기도 했었고 아무것도 해줄것이 없다는 무력감에 우울했었다.

교육을 포기한 것 같은 주변 교사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이었다면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수준의

다른 것들을 찾았을 것 같았으나

그때만 해도 나는 무지 젊었고

학교에서의 공부는 너무도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했

교사는 공부만 잘 가르치면 된다고 생각했었고

그들의 일생에 공부가 없다면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그런 꽉막힌 생각에 암담했었다.

이제는 안다.

공부가 다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교사의 일이란 공부보다 더 중요한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것이라는 것도 말이다.


네 번째 학교에서는 관심과 성향이 비슷한 교사들과의 친목과 네트워크를 자연스럽게 만들게 되었다.

아들 녀석이 어느 정도 컸가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때부터 회식이라는 곳에 참여도 하기 시작했고(지금도 회식은 별로 좋아라하지 않는다. 딱 밥만 먹는 정도를 선호한다.)

방학 때 동료들과 테니스도 치기 시작했고

학교 일 이외의 추가적인 연구 활동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시작한 연구 주제가 지금도 관심 있는 환경교육 관련인 것은 참으로 놀랍다.

그러다가 나는 새로운 2000년대 시대를 맞이하면서 늦은 나이에 박사과정 공부에 도전하게 된다.

그때 다시 공부에 입문하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장학사 시험에 도전했을 수도 있고(잦은 야근과 부족한 잠으로 쓰러졌을지도 모른다.)

교장, 교감 승진 대열에 합류하여 정신적으로 엄청 피폐해졌을 수도 있고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학생들과 수업을 하는 재미는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다행이다.


다섯 번째 학교에서는 2차 정체기였다.

학위 논문 작성에 모든 열정을 다 쏟는 시기였고 학교는 피하고 싶은 시끄러운 시기였다.

교장 선생님과 교사들간의 반목과 투쟁이 매일 교무실에서 일어났고

나는 그 중간에서 어느 쪽 편도 들지 못했다.

원래 절대적인 옳음과 그름은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일상 생활에서는...

교무실에 들어서기 전에는 심호흡을 해야했고

퇴근할때까지 너무도 많은 소음과 뉴스에 시달려야 했었다.

교사가 학생들의 수업 준비보다 다른 일에 신경을 더 써야하는 환경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하다.


여섯 번째 학교에서는 많은 양의 일에 휩싸여 살았다.

과학정보부일, 연구부일, 방과후일, 학년부일...

해도해도 돌아서고 나면 또 새로운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리 내 취미가 일이어도 너무 했다.

누구는 펑펑 놀고 승진 점수는 챙기고

누군가는 죽어라 노는 사람 일을 땜빵하면서

일을 하는 방식은 너무도 구시대적이다.

그렇지만 똘똘한 녀석들과의 수업은 즐거웠고

그들의 발전을 보는 과정은 항상 새롭고 힘이 나서 그 낙으로 버티고 있었다.

그런데 너무 많은 양의 일을 처리하다보면 번아웃이 오게 되어 있다.

그리고 그 번아웃은 항상 사람 때문에 시작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정말 지쳤던 한 해를 보내고서 결단을 내렸다.

더 이상은 안되겠다. 쉬어야겠다.

회복탄력성의 힘을 빌어봐야겠다.

특별학습연구년 신청을 하고

새롭게 대학에서 다양한 강의를 듣고

좋은 동료들과 많은 것들을 함께하며

나는 웃음도 찾고 회복과 충전

그리고 용서에 대해 생각했다.

(아직도 모든 것이 다 용서된 것은 아니다. 원천적인 용서는 신의 몫이다.)


일곱 번째 학교는 내 교사 생활에서의 정점을 찍은 곳이다.

스스로 찾아간 미래학교라 일을 많았지만

그리고 모두가 새로운 일이었지만

함께해서 즐거웠고

누구도 하지 못했던 일이라 신났고

그 일들이 우리나라 교육발전에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 더욱 소중했다.

나날이 달라지는 학교의 모습을 보는 것도

과학 수업 시간에 바뀌는 학생들의 눈빛을 보는 것도

그리고 학교 주변 정동이 갖고 있는 스타일과 아름다움까지 모든 것이 오랫동안 기억될 것이다.

가끔 정동을 갈때면 그 학교 운동장을 한 바퀴 돌곤한다.

내가 만들었던 빗물 저금통도 보고 텃밭도 본다.

함께 고민했던 외벽 색깔도 보고

마구 떨어진 은행 알에 난리났던 주차장도 살펴본다.

누가 뭐래도 내 교사 생활에 가장 찬란했던 날들이었다.


마지막 학교에서의 이야기는 브런치에 이미 많이 소개했으므로 생략한다.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았다.

나에게 <선생님 사랑해요> 라고 이야기해주는 학생들을 만난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제는 그런 말을 들을 수 없다는 것도 무지 슬프다.

오늘 내 후임으로 발령받아 그 자리에 오는 선생님도 아마 그런 기쁨을 맛보게 될 것이다.


새로운 학교로 오늘 이동하는 모든 선생님들(아마 걱정되어 일찍 잠을 깨셨을 것이다.) 모두 축하드린다.

아마 나는 계속 한 학교에서만 근무하는 사립학교였다면 정년퇴직까지 계속 있지 못했을 것이다.

똑같은 패턴과 지루함과 비슷함을 몹시 견디기 힘들어하는 스타일이다.

공립학교의 가장 큰 장점.

5년마다 어김없이 찾아오는 교사들의 정기전보이다.

돌이켜보니 그 5년의 시간마다 나는

교사로서 많이 성숙해져갔던 것 같다.

후배교사님들도 정기전보 이동을 즐기시라.

물론 다양한 이유로 새 학교가 당분간은

마음에 안들테지만 말이다.


(오늘의 그림은 멋지게 빼입고

새학교에 첫 출근하는 그 날을 그려본 것이다.

작년 학생들과 북촌의 정독도서관으로

과학 특강을 들으러 간 날 어느 벽화에서 본 그림을 모티브로 삼았다.

열심히 때빼고 광내고 다른 날보다 멋부리는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고양이의 눈이 포인트이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최강 추위를 이겨내는 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