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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기하는 용기

포기하지않으려는 노력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지금까지 내 글을 읽어주신 고마운 분들은 아실 것이다.

이번 글은 제목만 보고도 이상하다는 것을...

힘들어도 포기하지 말고 열심히 무언가 최선을 다하자는 것이

지금까지 내 글의 기저에 깔린 생각인데 제목에 <포기하는 용기>라니 말이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공식적인 포기는 합창대회 반주였다.

중 3때였던 것 같은데 전후의 자세한 기억은 안난다.

여학교의 행사 중 가장 민감한 것 중 하나가 합창대회였는데(한달 이상을 연습했다.)

우리반의 노래는 너무 빨라서 연주가 힘든 곡이었고

매일 아침 연습에 건성건성인 일부 반 친구들이 꼴보기 싫었었다.

내 마음의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때였나보다.

사춘기의 절정이었을 거다.

거의 2주일을 연습한 후 나는 우리 반 합창 반주를

고민 끝에 스스로 포기했었다.

내 생애 처음으로 중도 포기를 한 경우이다.

그 합창대회에서 결국 1등을 놓쳤던 그 미안한 마음이 아직도 조금은 남아있다.


가장 안타까운 포기는 나도 좋아하던 첫사랑 남학생을 내 친구가 좋아하는 것을 알고 깨끗이 포기한 것이다. 그때는 그게 우정이고 멋짐이라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아니었다.

사랑은 쟁취하는 것이 맞았으나

그때 나는 너무 어렸었고 친구도 소중했다.

그 첫사랑은 아직도 1년에 한번쯤은 내 꿈에 나타나기도 한다.

그때처럼 해맑고 젊고 환한 얼굴로 말이다.

그 꿈을 꾸고 난 날은 하루 종일 기분이 꿀꿀했다.


그리고 내 생애 가장 큰 포기는

교감 교장으로의 승진을 포기한 것일게다.

퇴직 모임을 하면서 아깝다고 하는 분들이 계셨는데 나는 별로 아쉽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멋진 학생들과 보낼 수 있어서

오히려 좋았다는 마음이 더 크다.

내 다른 글을 보면 괜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승진을 포기한 것은 오로지 한 가지 이유에서였다.

내 주위에서 승진을 위해 지나치게 노력을 하는 그룹들의 행태가 결코 좋아보이지 않았다는 거다.

그런 그룹에 발을 내딛고 싶지 않았고

그들과 결코 같은 그룹이 되기 싫었다.

물론 그 때 내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이 그랬다는 것이다.

롤모델로 멋진 분들을 보았다면

그런 선배들이 주변에 있었다면

나도 승진을 포기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교사에게 승진을 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교사를 하면서 승진 점수를 쌓는 것과

장학사로 전직하는 것이다.

승진을 꿈꾸는 교사라면

학생들을 위해 수업을 위해 더 모범적으로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야 마땅한데

전혀 그런 모습은 보이지가 않았었다.

승진을 위한 점수를 따기 위해서는 교장의 평가가 절대적이었다.

그러니 갑을 관계가 형성될 수 밖에 없었다.

장학사가 되려는 사람들도 그랬다.

수업은 자습을 밥 먹듯이 시키고

장학사 시험 공부에만 열심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것은 장학사 시험공부 항목은

수업 준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용들이었다.

내가 승진을 포기한 15년 전 이야기이다.

지금은 다행스럽게도 훨씬 나은 시스템으로 발전했다.


오늘은 타의에 의한 포기가 여러 번 일어난 날이었다.

바로 앞에서 버스를 놓쳤고 지하철도 놓쳤고 눈 앞의 맛집도 놓쳤다.

그래서였을까? 지하철 안에서 갑자기 배가 고프기 시작했다.

어제 점심을 많이 먹고 저녁은 딸기만 먹었고

오늘 아침에는 가지, 양파, 대파, 차돌박이 간장으로 볶은 것을 올린 덮밥과

돼지고기 넣은 김치찌개도 조금씩 먹고 길을 나섰는데

갑자기 기력이 훅 떨어지면서 배가 고픈거다.

대부분 가방에 사탕이나 과자, 에너지바 등을 하나씩은 넣고 다녔었는데 오늘따라 아무것도 없었다.

지하철 안에서 배가 아픈 것보다는 백배 나은데

그래도 난감했었다.

지하철역에서 내리지마자 바로 보이는 과자점에서 과자를 하나 샀지만

비닐 포장이 너무도 완벽해서 뜯어지지가 않았다.

즉시 포기하고 옆 편의점에서 쉽게 뜯어지는 빵 하나를 사서 먹었다.

그리고는 저녁을 맛나게 차려 먹겠다는 계획도 즉시 포기하고 마라맛낙곱새를 배달 시켰다.

내 취향의 메뉴를 고르는것쯤은 쿨하게 포기하였다.


오늘 내가 포기한 것들은 어찌보면 하찮은 것일 수 있다.

그러나 포기하는데도 용기가 필요하다.

작은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중요한 것, 큰 것은 절대 포기하지 않아야 한다.

제 2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이 시기의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건강이다.

건강을 위해서도 선택하고 지킬 것과

과감하게 포기할 것을 구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다.

이제 아파트 커뮤니티 센터에 가서 개인 PT를 알아볼 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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