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전 스타일은 결코 유전이 되지 않는다.
요즈음 내 차는 소유자만 내 이름이지
주 운전자 및 사용자는 아들 녀석이다.
오래전부터 보험은 우리 두명이 운전하는 것으로 들어놓았고
나는 점점 운전량과 횟수를 줄여가고 있는 중이다.
아들 녀석은 직장이 지하철로 다니기에는 거리가 애매한데(지하철 역과 역 중간쯤에 위치한다.)
자차로 가면 경로도 거의 직진이고 주차는 회사 주차장에 하면 되니
아들 녀석이 주로 차를 가지고 다니는 것이 맞고
자동차도 매번 주차장에 세워놓기만 하는 것은 결코 자동차에게도 좋은 일이 아니다.
오늘은 저녁에 회식이 있다고 아침 출근길에
본인이 운전해서 회사를 가고
나보고 같이 타고 가서 차를 가지고 집으로 오면 어떻겠냐고 하였다.
방학 기간 중 몇 번 그런 적이 있다.
그런데 그 15분 짧은 기간 동안
최근 사이가 너무도 좋았던
(남편 항암 시작과 동시에 착한 아들이 되었었다.)
아들 녀석과 틀어지는 일이 발생한다.
아무런 조짐도 없었던 평화로운 아침 출근길이었다.
평소에도 나는 아들 녀석의 운전 스타일이
나와는 다른 형태라는 것은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나는 지나치게 안전 운전을 하는 스타일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젊은 남자가 나처럼 조심조심 운전하는 사람이 어디있겠냐는 이야기도 인정한다.
나처럼 살살 다니는 것이 교통 흐름에 방해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수긍한다.
(그 정도는 아니다. 운전 면허 딴지 40년이다. 나는 빠른 속도가 무섭다. 그래서 놀이기구 탑승과 스키타는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운전할 때 뭐라 뭐라 훈수 두는 것을 질색하는 것은 나랑 닮기도 했다.
과거 운전면허도 없는 친정아버지가 내가 운전할 때 훈수를 그렇게 두셔서 화가 났던 기억도 있다.
그런데 오늘은 유달리 빠른 속도로 운전을 하는거다.
딱히 출근 시간에 늦은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는 속도가 나는 차에 타면 본능적으로
좌석 위의 손잡이를 꼭 잡게 되고
눈을 감게 되며(오늘은 해가 비쳐서였을 수도 있다.)
소리를 내게 되는데
딱 한번 있는 우회전 진입로에서 그 일이 벌어졌다.
횡단보도 신호에 걸려서
앞 차가 한 대 있고
두 번째로 우회전 대기 중이었는데
슬쩍 차를 빼서 옆 차선으로 나가려고 시도하다가
직진차들이 오는 것 같으니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는데
뒤에서 기다리던 세 번째 차가 빠빵을 했고 내 눈 옆으로 세 번째 차 앞 부분이 보였다.
물론 다행스럽게도 접촉사고가 나지는 않았는데
놀란 소리를 냈더니 아들 녀석이 화를 낸다.
내가 소리를 내서 본인이 놀라니 더 위험하다는 거다.
그 말도 물론 맞다. 내소리가 조금 크긴 했다.
그런데 놀라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를 그럼 손가락이라도 물고서 참으라는 것인가?
다른 사람의 차를 탈때는 안그러는데 왜 자기가 운전할때만 그렇게 민감하냐고 힐난한다.
다른 사람의 차를 얻어 타는 것은 내가 그 사람의 편의를 제공받는 감사한 일이니 참는다고 했더니
자기가 운전하는 것도 똑같이 생각하고 참으라 한다.
바로 이점이 내가 폭발한 대목이다.
아들 녀석이 예의 차려야 할 남인가?
다시는 니가 운전하는 차를 타지 않겠다고 더 이상의 말을 막았다.
다소 폭군 스타일이기는 하나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가는 마음이 더 상할 듯 했다.
역시 가족간의 운전 교습이나 동승은 가급적 피하는게 맞다.
본전도 못차린다.
지금은 내 명의의 차인데도 이런데
나중에 자기 명의의 새차를 태워줄때는 어떻겠나?
절대 타지 않아야겠다. 괜히 서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오늘 그림은 올드카를 그려보았다.
내 마지막 자동차는 그림과 달리 파란색 자동차도 아니고 패션 올드카도 아니지만
이제 이별이 점점 가까워지기는 한다.
아침에 들었던 서러움은 매운 닭볶음탕을 만들고
맛을 보면서 조금은 사라졌다.
오늘은 딱히 할 일이 없는 날이었다.
전화도 톡도 조용한 날이었다.
무료함이 이렇게 많은 생각의 확장을 이끌고
결국은 기분을 우울하게도 만들 수 있다.
오랜만에 냉장고 청소를 하던지
지하 커뮤니티센터에 내려가서 러닝 머신이라도 뛰어야 할 것 같다.
아직도 하루가 많이 남았다.
이제 고작 오후 네시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