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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제주 episode3.

역시 나는 길치였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퀸사이즈 침대를 혼자 휘젓고

그 폭신하고 향기로운 이불과

무려 4개의 베개가 있는데도 잠을 설쳤다.

만보이상 걸을만큼 걸어서

발가락에 쥐가 날까 걱정했는데

쥐는 안나고 잠이 달아났다.

커피는 입에 대지도 않았는데 말이다.


아침 해는 대략 여섯 시 반경에 뜨나보다.

그 이전 시각까지 바닷가에는 낚시배로 추정되는 불빛만이 멀리서 비추었다.

오늘은 뭐할까? 뭐 먹을까?

이런 고민은 잠시였다.

아침 일찍 퇴직금이 입금되고(사기업 대비 너무 적다.)

나는 퇴직자가 되었음을 또 한번 실감한다.

우리반 장난꾸러기가 어느 새 고등학생이 되어

6시 53분에 등교한다는 인스타 스토리가 올라온다.

장하다. 응원한다. 박수 이모티콘을 보내주었다.


제주 지도를 봐도 딱히 끌리는곳은 없으나

그리 멀지않은 함덕쪽을 돌아보기로 한다.

유명 연예인이 추천한 식당에서

어젯밤 술도 먹지않았는데 아침 해장국을 먹고

(그렇게 꼴딱 넘어갈만큼 맛있지는 않았다.)

유채꽃 명당이라는 서우봉을 오른다.

아니다. 이제 막 피기 시작했다.

3월 말쯤이 만개일듯 하다.

간간이 시작하는 유채꽃을 열심히 찍어보다가

민들레도 쑥도 꼬들빼기도 냉이도 보았다.


그리고는 역시 본태성 길치인 나는

함덕바닷가쪽으로 내려오지를 못하고 반대쪽으로 가서

이름모를 낯선 골목길을 헤매고 헤매이다가

그래도 운좋게 마침 오는 버스를 타고서야

(버스 배차 간격이 20분이다.)

함덕바닷가 유명 카페에 들어왔다.

후배들이랑 몇년전에 사람 미어터지는 8월에 왔다가 쫓겨나듯이 나갔던 정신없던 그 페인데

오늘은 평화롭기 그지없다.

카페의 위치는 정말 독보적이다.

비수기에는 어디든 여왕님 대접이 가능하다.


그나저나

까마득하게 오래전

누구와 함께 왔다가

바닷가 모래언덕에 오래토록 앉아있다가 간 그 곳은

함덕일까? 협재일까?

두 바다가 옆 동네도 아니건만(심지어 반대 방향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까만 모래 였던것 같은데(그것은 삼양해수욕장인데)

오늘 함덕은 까맣지 않다.

점점 미궁에 빠진다.

문득 궁금해지지만 아무려면 어떠랴.

다 지난 오래 전 일이다.

잊어버렸으니까 견디고 살 수 있는거다.

그때도 오늘처럼 버스를 탔던것은 기억이 난다만.


(앗. 대가족이 들어왔다. 엄청 시끄럽다. 그래도 대가족 여행이라니 조금은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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