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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제주 episode5.

모든 일은 어쩌면 갑자기 다가온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언제부터인가 여행 짐을 미리 싸지 않는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우리 발목을 잡았던

2020년 2월인가부터인것 같다.

그 해 나는 무지 정들었고 최선을 다고 의미가 있었던

미래학교 교무부장을 무사히 마무리짓고

영재원 파견을 준비하고 있었고

나 포함 4명의 공노비들이 이별을 핑계삼아

해외여행을 준비하고 있었다.

우리는 별 메리트없이 열심히 일만 하는 우리를 공노비라 지칭했었다. 웃픈 일이다.


각 지역을 맡아서

기차.숙소도 기타 여러가지도 착착 예약을 끝냈고

나는 그 여행을 위해 겨자색 캐리어도 샀다.

이것 저것 미리 짐도 챙겼었다.

일행중 한 명은 면세품 사전 구입도 완료했다.

그런데 코로나19 상황이 점점 심상치 않았고

우리는 강행이냐

예약한 경비 일부를 손해보고 취소하느냐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그때 그런 사람 많았다.

선택에 따른 결과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여행이었을수도 있었으나

착하고 말 잘 듣는 공교육 교사였던 우리의 선택은

취소일수 밖에 없었고(코로나19 환자 발생이 매일 국가 최고의 이슈였고 개학을 앞두고 있는 그런 시점이었다. 나는 아픈 부모님이 계셨던 시점이었다.)

그 겨자색 캐리어를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아팠다.


미리 짐을 싸면 여행 계획에 이상이 생긴다는 말을

전해들었던것도 같다. 동티난다고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너무나 기대되는 여행일수록

짐을 대강대강 설렁설렁 싸는 흉내를 내게 되었다.

마가 끼지 않게 하는 나만의 징크스인 셈이다.

대충 가져갈것들을 가방에 쓱 던져두었다가

전날 밤에 짐을 그제서야 싸는것처럼

주섬주섬 넣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머리속으로는 짐을 싸놓고

정작 실행은 그 전날밤에

마치 <이번 여행에 나는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아.>

이런 담담한 느낌으로 짐을 쌌다.

그런데 새 캐리어는 웬말이냐

앞뒤가 맞지않고 기대하는 마음을 감추기는 힘들었다.


가장 마지막까지 고민한것은

노트북을 가져갈까 말까였다.

토요일 특강

일요일까지 보낸다했던 과학관 프로그램 계획 파일의

완벽한 준비가 끝난것은 아니었고

브런치도 핸드폰으로 작성하는것이 그리 편하지는 않았고

혹시 급한 일이 있을까하는 아직은 못버린 공노비 근성때문이었다.

그런데 놓고가자 생각한건

비즈니스 호텔급에서 제공되는 컴퓨터를 믿었기 때문이다.

오래된 내 노트북 성능보다는 낫겠지

(성능은 나았으나 서서 긴 작업을 할 수는 없었다.)

그런 안일함이 어제 나의 저녁을 혼돈과 피곤으로 날려보냈다.

물론 갑자기 나타난 일 때문이다.

노트북만 가져왔다면 아들과 페이스톡을 하면서

서류를 작성하는

처음해봐서 신기하지만 어려운 일은 줄었을텐데 말이다.


고맙다.

어려운 서류를 빠르게 준비해준 제자1과

번거롭지만 자료를 찾아보내준 후배1과

여러가지 힘든 자료를 함께 만들어준 아들과

오늘 오전 마무리작업을 위해 자신의 노트북을 빌려줄 예정인 제자2와

무엇보다도 언니의 두번째 삶을 적극 지지해주는 막내동생에게 고맙다.

세상은 혼자 살수는 없는 법이다.

구조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런데 아무리 생각해봐도 PC방에 가지는 못하겠더라.

초임교사 시절 우리반 말썽쟁이를 찾으러 들어간 신월동 PC방에서 나는 다른 세계를 보았었다.

트라우마가 있다.

그곳에서 정신 집중 문서 작업을 할 수는 없을듯 하다. 오늘 오전은 제주시에서의 서류 작업이다.

물론 처음이다. 어제 오후 갑자기 다가온 일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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