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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골목 투어 마흔번째

용산전자상가와 노량진역 주변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늘은 나를 혼밥과 혼잣말의 수렁에서 건져준 후배님의 초대로 용산전자상가를 방문했다.

용산역 주변은 나름 친숙한 곳이다.

4년여를 그곳에서 살았으니 말이다.

나의 주변 산책 취미는 그 때도 있었으므로

용산역에서 삼각지역, 이촌역, 노들섬공원, 동부이촌동, 서부이촌동, 원효대교 부근까지가

모두 나의 산책 범위 안에 있던 곳들이다.

그 중에 용산전자상가는 오늘 초대한 후배의 직장이 있는 곳이어서 처음 방문한 이후로

학생들을 인솔해서 천문대에 두 번 왔었고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도 달과 별은 보인다.)

그 후 아들 녀석과의 산책으로도 서너번 왔었고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의 결혼식에도 두어번 왔었으니 낯선 곳은 분명 아닌데

헷갈리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있다.

태생적 길치인 나는 두어번을 헤매다가 그래도 약속 장소를 잘 찾아갔다.


용산전자상가는 아직까지는 옛 모습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언뜻 보면 을지로의 올드하고 빈티지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곳도 있다.

현대식으로 바뀐다면 여기도 서울의 랜드마크가

될 수도 있어보이는 크기와 역량인데

아직은 내부 사정상 그 정도까지의 변화와 혁신은 힘든 것 같다.

그래도 오늘은 멋진 후배 덕분에

미루어두었던 일주일치 수다도 다 떨었고

(의도치않게 처음 만난 영재교육 전공 후배들에게

폭풍 설교를 퍼부었다.

너그러운 용서를 부탁드린다.

퇴직 3주차가 되면 대화가 고파진다.

나도 몰랐었다.)

맛난 커피와 돈가스도 얻어먹었으니 행복 지수가

엄청 올라갔을 것이다.

수다가 이렇게 도파민이 나오는 것인지,

살아있음을 확인받는 일인지 새삼스럽기만 하다.

평생 교사라서 이야기하는 것에는 지친 상태인데도 말이다.


용산전자상가까지 나간김에

돈가스 소화도 시킬겸

지하철 한 정거장 위치에 있는 노량진역을 방문했다.

노량진역 바로 옆에 있는 나의 최애 구단의

공식 연습장인 노량진 야구장을 방문해보고 싶었다.

혹시 하고 갔으나 역시 선수님들은 없었다.

내가 그렇게 행운이 마구 따르는 스타일은 아니다.

그래도 그들이 1주일에 한번은 연습하는 그 장소를 방문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어려운 상황에 있는 그들에게 힘을 주었다고 나름 나를 칭찬해주었다.

옆 축구장에는 따뜻해진 날씨에 공차는 사람들이 꽤 많았다.


노량진역은 누가 뭐래도 수험생의 성지이다.

아들 녀석도 이곳에서 재수 시절을 보냈고

둘러보니 사방이 수험생을 위한 학원들이다.

공무원 준비도 임고준비도 수능 준비도 각종 자격증 준비도 이곳이 메카이다.

예전에는 단층 건물 학원이었다면 이제는 고층 빌딩 학원들이다.

얼마나 많은 돈을 벌었는지 알 수 있다.


이전에 노량진역 근처에 왔던 기억을 되살려본다.

아마도 처음 와본 것은 고등학교부터 친하게 지난 우리 그룹 친구의 함받는 날이었을 것이다.

그룹내 결혼이어서 우리 그룹 모두의 잔칫날이었다.

노량진역에서 내려서 언덕 골목길에서 대기하다가 신랑 친구들이 함을 가지고 오면

(그 친구들도 다 같은 그룹이다.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함잡이들을 집으로 모셔오는 중차대한 일을 맡았었다.

신랑친구들은 나름 오징어 가면도 쓰고

골목길에서 약간 실랑이도 했지만

곧 신부친구인 우리들 꼬임에 넘어가 주었던

우리 모두의 축제였던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지금은 미국에 살고 있는 그 부부가 생각나는 노량진역이다.


근처의 수산 시장은 나와는 별로 친숙하지는 않다.

해산물의 비린 내음과 친하지 않아서이다.

한두 번쯤 들어가 본 것도 같고 생선을 사고 주변 식당에서 회를 떠서 먹었었다.

생선 종류 음식의 맛을 잘 모르는 나는 초고추장만

엄청 찍어 먹었던 기억이 있고

건물이 새로 올라간 것을 멀리서 보면 멋있는데

분쟁이 있었다는 기사를 읽은 기억도 난다.

친정집 제사 전 주말이 되면 아버지는 이곳에서

큰 사이즈의 생선들을 사가지고 오셨었다.

그러면 엄마는 투덜대면서 그 생선들을 널어서 꼬들꼬들하게 며칠을 말렸고

제사 전날 밀가루를 발라 잘 구워내곤 하셨다.

나는 잘 먹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직도 생선살 바르는 일이 버거운 것을 보면...



퇴직 3주차가 지나간다.

하루에 한 가지 약속만 있으면 이야기도 하고

음식도 나누고 그 근처 산책도 하고

그럭저럭 하루가 잘 지나갈 것도 같은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영양가 있는 일을 안했다는 것에서 오는 상실감은 있다.

대학 교수들은 은퇴후 몇 학기쯤은 1~2개의 강의를 계속하게 해주는 시스템이 있는 듯 하다.

부럽기만 하다. 교수와 교사의 차이는 생각보다 크다.

이대로 한 두 달이 지나면 나의 강의 능력이 소멸될까봐 그것이 두렵다.

강의는 하면 할수록 입이 트이는데 말이다.

유튜브 강의래도 해야하나 고민을 좀 해봐야겠다.


(이 글을 쓰고나서 오늘 노량진야구장 연습 영상이 유튜브에 올라왔다. 오전에 한 모양이다. 오전에 갈까하다가 오후에 간것인데. 아쉽기 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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