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시장 가는 길과 오는 길목
제주를 다녀오고 나니 집안이 왜 이렇게 더러워보이는지 금, 토, 일 모두 청소에 전념하는 날들이 되고 있다.
화장실 변기와 바닥이 더럽고 물때가 보여서 고무장갑끼고 세제 뿌리고 주저앉아서 빡빡 닦아주었고
어제 일부 전기를 끊게 만든 토스터키와 포트 등
식기도 뽀득뽀득 닦았고
청소기는 내부 청소 A/S를 하는 김에 세세히 정리되었고
오늘은 현관입구 타일이 더러워보여 또 세제와 물휴지까지 총 동원하여 닦아주었다.
눈에 안 보이던 것들이 이렇게 세세히 보인다는 것은 좋은 일일지도 아닐지도 모른다.
내일은 그릇을 몽땅 꺼내 닦아볼 예정이다.
오전을 청소로 보내고 날씨가 괜찮아보여 길을 나선다.
경동시장에 가서 봄나물을 사올까 싶어서였다.
작년 이맘때 스치듯 돌아보고 시장 내 스타벅스만 탐방하고 온 기억이 있다.
내일 벌써 다섯 번째 항암 주사를 맞는 남편 맞춤형 나물 반찬을 해볼까 해서이다.
딱딱한 것도 안되고 자극적인 것도 안되고
생물도 안되고 고기는 안 먹고 이래저래 할 수 있는 반찬이 제한적이다.
집에서 조금 걸어가면 경동시장까지 한 번에 데려다 주는 버스가 있다.
서울의 버스 안내 시스템은 참으로 편리하다.
그 정거장을 지나가는 모든 버스의 경로도 알려주고 얼마 기다려야 오는지도 알려준다.
제주와 토요일에 들렀던 광교와는 다른 점이 있다.
제주는 몇 분쯤 후에 도착하는 버스가 무엇인지만 알려주고 그 버스의 경로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광교는 경로 안내는 붙어있는데 몇 분 후가 아니라
몇 정거장 뒤에 버스가 있다고만 안내가 나온다.
10분 정도까지는 남은 시간이 나오더니 갑자기 3정거장 남았을때부터는 정거장 숫자만 표시되었다.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안내판은 익숙한 사람보다 그 지역에 낯선 사람에게
더 친절해야하는 것이 기본이다.
익숙한 사람은 굳이 안내판을 볼 필요도 없다.
이제 버스도 택시도 핸드폰으로 모든 정보가 제공되는 시대이다.
그런데 디지털 정보 찾기에 힘든 어르신들을 위해서라도 안내판은 꼭 필요한 법이다.
그래도 한 번 가보았다고 경동 시장 인근이 낯설지만은 않다.
옆으로는 청량리시장과도 연결되어 있고
(왜 이름이 다른지는 모르겠다. 이어져있던데...)
뒤를 보면 약령시장이 위치하고 있다.
한참 전 약차를 다려먹는다는 지인을 따라 약령시장을 방문한 적이 한 번 있었는데
그때만 해도 한창 젊었던 나는 약재를 사러 나오시는 어르신들을 도통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는 알 것도 같다. 그 마음을...
건강한 먹거리도 사고 싶고
시장에 와서 많은 사람들의 생동감을 받아가고도 싶으셨다는 것을...
오늘 내가 그런 마음이기 때문이다.
제주 동문시장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분주하게 오가고 있는 주말의 경동시장에서
나는 양념 잘배인 황태 한 마리와
고추장을 베이스 양념에 절여둔 마늘쫑과
비금도산 섬초, 열무 물김치, 그리고 딸기 한 팩을 사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버스 속에서 낯익은 지명을 보았다. 마장동.
내 중 3 시절 청소년 적십자 동아리 단장의 자격으로
한 달에 한번씩 서울 중 고등학교 회장단 모임이 그 당시 마장동에 위치했던 적십자 지사에서 있었다.
당시 나의 화곡동 집에서 마장동은 너무 멀고도 먼 거리였고
나는 종로까지 버스를 타고 와서 다시 또 그만큼의 거리의 버스를 갈아타는 고난의 시간을 보내야했으며
나는 그날마다 여지없이 멀미를 했었다.
그래도 그날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돌아가는 길
종로에 있었던 당시 유일한 백화점(화신백화점이었나 신신백화점이었나) 지하 푸드코트에서
먹는 비빔밥 때문이었다.
지금은 비빔밥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양이 너무 많다.)
그때는 가장 싼 음식이었고 매콤함으로 멀미를 다스리기 위함이었다.
비빔밥을 먹으면서 매번 마장동을 원망하였다.
왜 그리 먼 곳이냐고...
그런데 이제는 알겠다.
시내 중심부에서 보면 마장동이 화곡동보다 더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어디를 기준점으로 삼느냐에 따라서 거리는 달라진다.
마음의 거리도 그러하다.
저 사람과 멀어지고 있다는 느낌이 갑자기 들 때가 있는데
그것은 그 사람이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의 기준점이 변해서일수도 있다.
경동시장산 마늘쫑은 맛났고
열무김치는 조금 더 익어야 할 것 같아서 내놓았고
섬초는 재빨리 데쳐서 무쳐두었으며(건강하게 달다.)
황태는 오늘 말고 내일 구울 예정이다.
오늘 남편의 항암전날 보양식은
감자, 당근, 호박, 소고기 넣어서 끓인 고추장찌개(소고기는 물론 안먹을 것이다만)
볼락구이, 섬초, 야채로 만든 잡채이다.
항암주사를 맞고 오는 내일은 콩나물국, 양념황태구이가 메인이다.
경동시장에서 담아온 봄 내음과 넘치는 생동감이 남편에게 온전히 전달되기를 바래본다.
(경동시장 아치형 구조물에 올라간 고양이는 안전하게 내려왔으려나 모르겠다.
한참을 그 곳에서 조각처럼 앉아있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