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골목 투어 서른 세번째
화곡동 105-59번지 이야기
어제 한 분의 부고가 섞인 기사를 발견했다.
<한국인 첫 국제 콩쿠르 우승, 1세대 피아니스트 한동일씨 별세>
1965년 한국인으로 첫 국제 콩쿠르에 우승한 피아니스트이다.
나에게는 약간 각별하신 분이다. 그 분은 나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나에게 화곡동 시장 옆 후미진 골목길에서 피아노를 가르쳐주신 분이
바로 피아니스트 한동일 선생님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집 거실에 피아노를 두고 레슨을 했던 때이다.
어느 여름쯤엔가 잠시 귀국했던 한동일 선생님을 그 댁에서 뵙기도 했었고
아마 지금 같았다면 인증샷도 찍고 싸인도 받고 인스타그램에도 자랑스레 올렸을텐데
그때는 마냥 수줍어서 숨어만 있었더랬다.
그 분의 연주를 듣기도 했고 똥땅거리는 나의 연주를 들려주기도 했었다.
도레미파솔라시도부터 바이엘 초급에서 체르니30번까지 그 명장의 어머니에게 기초를 배웠으니(가느다란 막대기로 박자를 맞춰주셨다가 가끔 틀리면 손등도 맞곤했다. 스파르타식이었다.)
나도 계속했다면 한동일 선생님까지는 아니어도
꽤 촉망받는 피아니스트가 될 수도 있었겠다.
그 당시는 꽤 쳤다고 할 수 있는 체르니 50번까지 치고, 콩쿨대회도 나가고, 음악방송에 나가서 연주도 했으나 나는 피아노 치는 것이 마냥 즐겁지는 않았다.
오래 앉아서 연습을 해야하니 엉덩이가 힘들었고 손가락도 너무 아팠다.
똑같은 곡을 30번씩 연습하고 동그라미 치는것도
힘들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집이 나를 피아니스트로 키우기에는 재정적으로 힘이 모자라다는 것을 어슴프레 눈치채고 있었다.
한동일 선생님 어머니께서는 소질이 있다고
음악적인 재능이 있다고(나의 탑100귀와 절대음감을 알아보신게다.)
피아니스트나 아니면 성악가라도 시키라고 하셨었으나...
부고 기사를 보고나니
피아노를 치러 타박거리며 걸어가던
유치원때부터 초등학교 저학년때까지의
피아노책을 넣은 그 낡은 가방을 든 나와
화곡동 시장 옆 골목이 무성 영화처럼 스쳐간다.
딸 넷 중에 큰 딸인 나는
화곡동 시장을 거쳐 화곡초등학교와
우체국을 지나서 있는
그 당시 그곳의 핫플 화곡유치원 1회(?) 졸업생이다.
1회인지 2회인지는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만...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그래도 첫 딸이라 유치원 옷도 입히고 모자도 씌워주었다.
그리고 나름 그 동네의 잘 사는 집 아이들과 네트워크도 형성해주었다.
그 당시의 나는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많은 투자였다는 것을 알겠다.
내 밑의 동생들은 늘상 이야기한다.
<언니만 특혜를 받아서 유치원에 다녔었다고, 자기들도 다니고 싶었다고>
나는 이야기한다.
<내가 다니고 싶다고 한 것이 아니라고,
나에게 해준 부모님의 투자와 기대가 마냥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라고,
많은 부담으로 다가올 때도 종종 있었다고>
그리고 그 유치원을 오고 가는 꽤 긴 길에서
(지금도 버스로 두 정거장은 족히 된다.)
나는 속상해서 몇 번 눈물을 훔치기도 했었다.
줄넘기라던가 공기놀이 등
다른 아이들이 다 하는 것을 나는 잘못했을 때였다.
물론 집에 와서 엄마에게는 말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유치원에서 나는 운명처럼 초등학교때까지 나의 라이벌이었던 남자애 K를 만나게 된다.
집안 형편은 엄청 차이나게 부잣집이었고
(그 시절 그 동네 최고의 인텔리 집안이었다.)
생긴 외형에서도 부티와 귀티가 나던 그 K를 꼭 이기고 싶었었다.
왜냐면 K어머니가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 어린 나이에도 기분이 나빴었기 때문이다.
<너 따위가 감히 우리 아들보다 공부를 잘해?> 이런 눈빛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그걸 알아차리다니
꽤 노골적이셨나보다. 그 어머님은.
초등학교때 열공한 이유의 반은 그 남자애 때문이었다.
잠자고 있던 나의 경쟁 의식에 불을 붙여준 셈이다.
이제는 오히려 고마운 일이라는 것을 알겠으나
고맙다는 말을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도 많이 흘렀다.
유치원에서 멀지 않았던 그 K네집의 파란색 대문이 아직도 또렷이 기억난다.
담벼락에 낙서하고 도망가지는 않았을것 같으나
분명치는 않다.
그 지역 제일 번화가 거리였다.
지금으로 보면 학교 근접 지역에
상가 인근 지역이었다.
정작 우리집 대문 색깔은 기억이 도통 나지 않는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오늘.
여러 단톡으로 새해 인사가 오고간다.
나의 정년을 축하한다는 메시지와 전화도 이어진다.
그러나 나에게는 아직 24일이나 시간이 남아있다고 위로 겸 의지를 다져본다.
의지를 불사르지 않으면 독감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벌써 학생들 중 독감 환자가 10여명 발생했다. 면역력 나쁜 늙은 나는 경계심을 가져야만 한다.
그렇지만 오늘 밤은
화곡동 시장에서부터 유치원까지의 그 익숙했던 골목길을 다시 한번 걸어보고픈 날이다.
그러기에는 화곡동 105-59번지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