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골목 투어 서른 두번째
영등포에 얽힌 추억
세 번째로 티눈 아이싱 치료를 받으러 나섰다.
지난 주에 갔어야하나 서울대 특강 인솔로 한 주를 건너뛰었다.
용산까지는 축구하러 가는 아들 녀석 차를 타고 가서 거기서 목동을 가면 된다.
신용산역살때부터 수 백번은 갔던 길이다.
그때만 해도 엄마, 아버지가 투병 중이셔서 매주 목동에 있는 친정집에 주말마다 간병 당번 차 들렸었다.
용산역에서 1호선을 타고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는 그렇게 익숙했던 길인데
오늘은 무엇엔가 홀린 듯이 걷다보니 신용산역 개찰구 앞이었다.
아차 싶어서 갔던 길을 따라 다시 용산역으로 회귀하여 1호선을 탔다.
지하철이 한강위를 건너는 순간에 보이는 일출 사진도 찍고
나름 낭만적인 순간을 보내다가 섬뜻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들어보니
아뿔싸 신길역에서 출발하는 순간이었다.
오늘 벌써 두 번째나 길을 놓친다.
순간 드는 생각은
<치매구나. 엄마가 치매 초기에 길을 잘 못찼으셨었는데> 였다.
그러다가 제 정신이 돌아와서 이 문제 상황을 어떻게 해결할까 고민했다.
방법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다음 지하철역에 내려서 다시 거꾸로 가서 신길역으로 가는 방법과
(그러면 오목교역에 내려서 아픈 동생네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오목교역 근처의 병원으로 가야한다.)
아니면 다음역인 영등포역에서 옛 기억을 되살려 동생네 아파트로 가는 버스를 타는 것이다.
(그러면 동생을 보고 걸어서 오목교역으로 가서 진료를 받고 막내를 만나고 지하철로 귀가하면 된다.)
나는 오랜만에 후자를 택해보기로 했다.
순간적인 선택의 논리적인 근거는 미약하다.
나는 영등포구 화곡동 출신이다.
물론 태어난 곳은 대전 외갓집 근처 병원이고
본적은 김해어디쯤이고(가본적은 없다)
어렸을 때 서교동 근처에서 살았다고 하나
나의 기억은 화곡동에서 부터 시작된다.
영등포구에서 출발한 화곡동은
그 이후로 강서구가 되었고
우리집은 강서구 내발산동으로 집을 지어 이사를 갔다가
결혼후 양천구 목동 인근에서 살게 되었으니
나의 출신은 영등포구가 맞다.
그리고 그 시절 나와 친구들은 시험이 끝난다던가 하는 중요한 시기가 되면
영등포 시장이나 영등포역 인근으로 출동하고는 했었다.
그 당시 최고의 번화가는 영등포였던거다.
우리가 아는 제일 큰 세상이었다.
목동 지역에 살때는 지방에 기차타고 다녀오면 늘상 영등포역에서 내리곤 했었으나
오늘 나의 정신없는 관계로 거의 10년만에 의도치않게 영등포역에 내린 것이다.
그래도 옛 기억을 더듬어 더듬어 백화점쪽으로 길을 나서고
목동쪽으로 가는 버스도 찾았으니 그리 나쁜 선택인 것만은 아니었다.
나의 친한 친구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영등포여고로 갔다.
영등포여고가 영등포역에 있는건 아니지만
오히려 신길역에 가깝다만
그들은 영등포 골목을 구석구석 잘 알고 있었으나
나는 영등포시장과 역전 골목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이 조금은 있었다.
해가 질 때쯤 그곳을 들렀다가 술취한 아저씨들을 너무 많이 봤던 기억이 있어서였나보다.
오늘 살펴보았더니 그 사이에 못보던 건물들도 많이 생겼고(무려 십년쯤 지났으니 그럴만도 하다.)
신세계백화점 뒤편의 그 무섭고 반짝이던 건물들은 말끔하게 정리가 되었고
길가에 가득하던 좌판들도 호떡집 몇 개 빼고는 없어졌으나
운전면허를 따고 두근두근 첫 번째 운전 연수를 했던 무시무시했던 길목은 그대로이고
(세상에 오르막길이 그리 많은지 처음 알았었다.)
대학 1학년 말 처음으로 누군가와 데이트 비슷한 것을 했던 마구 설레였던 그 골목도 그대로이고
영원한 나의 짝사랑과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화를 봤던 그 영화관도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왜 굳이 영등포까지 와서 영화를 봤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만.
주말 이른 아침 고즈넉한 버스에 타고 오다가 차창밖으로
아들 녀석이 공익 근무했던 의료보험관리공단 건물도 지나고
목동 진입 다리 초입에 있는 <코끼리베이글>에
문 열기전부터 줄 서있는 대단한 사람들도 보았다.
(이 추위에 말이다. 나는 베이글 맛의 우열을 판단하기는 쉽지않던데 말이다.)
그리고는 여전히 아픈 동생과 눈맞춤 오분을 하고(얼굴이 조금 부어있더라. 내가 들렀다가는것을 알기는 할까 모르겠다만)
오늘도 역시 환자가 만원인 피부과에 오픈런을 하여 티눈 제거를 받고
(세번째라 방심했었나보다. 오늘이 처치 후 제일 아팠다.)
오늘 아침 방금 운전 면허를 세 번만에 딴 조카 녀석과 막내 동생과 따뜻한 밥을 먹었다.
이만하면 훌륭한 토요일 한 나절이다.
나의 실수로 잠시 들렀던 영등포여.
이제는 자주 올수는 없지만
나는 자랑스런 영등포구 출신임에 틀림없다.
주민등록증에 나와있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