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하는데까지는 모종의 준비가 필요하다.
어제 전화 한통으로 꼭 해야할 일이 하나 더 생겼는데
(원래 토요일에 오랜만에 영재원 특강이 있었다.)
예전처럼 전투적으로 일의 진도가 나가지 않는 나의 몸과 마음이 이상하기만 하다.
아니다. 예전에도 그러기는 했다.
꼭 해야만 하는 일이 생기면 딴청을 피고 싶어지기는 했었다.
학생때 기말고사 준비를 앞두고는 책상 정리를 시작하곤 했고
교사때 기말고사 출제를 앞두고는 여름 옷장 정리를 하곤 했고
이상하게 중요한 머리를 써야하는 시기에 내용 정리가 안되면
몸을 쓰곤 하는 루틴이 있었다.
어제가 그런 날이였다.
빨리 빨리 머리가 돌아가야 하는데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하루에 한 번 이상씩은 산책을 하고 있었다.
건강 관리와 다리 근육량 보존 목적 때문이기도 하고
집에만 있으니 지루하고 시간이 안가고 힘들어서 이기도 하고
로봇 청소기 돌아가는 작업에 방해가 되지 않으려는
큰 의도이기도 하고
묵묵히 열심히 사는 사람들과 식물들에게 잠시나마 위로 받고 싶은 마음에서이기도 하다.
그런데 해야 할 일이 생긴 어제 생각보다 진도가 나가지 않으니
산책이 하고 싶은 거다.
또 딴청 모드 발동이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선글라스를 쓰고 집을 나섰는데 나선지 오분만에 힘이 들기 시작했다.
너무 덥다. 잘못하면 산책하다 쓰러지거나 탈수증세가 올 것도 같다.
그래도 5천보 정도의 산책을 마치고 들어오면서(길을 나섰으니 그냥 돌아오는 것은 조금 그렇다.)
이제 당분간 더 이상 낮 시간 산책은 불가함을 알게 되었고
이제부터 산책 시간은
아침 일찍이거나 해가 진 저녁으로 변경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산책을 하고 다시 노트북 앞에 앉았으나 여전히 일거리 진도가 팍팍 나가지는 않는다.
시간도 많이 남은 것이 아니고
토요일에는 특강, 일요일에는 결혼식, 월요일에는 공개수업과 워크숍 참가등의 나름 일정이 있는데 말이다.
원래 일이란 시작하는게 어렵지 또 시작만 하면 일사천리가 될 때도 있는데
그 멋진 출발이 쉽지 않은게 문제이다.
또 딴청을 피워본다.
남편의 환자식 메뉴를 세운다.
금요일 저녁은 삼계탕
토요일은 전복죽, 카레밥, 생선구이 메뉴 선정과 준비물이 있는지 냉장고를 체크한다.
화요일 저녁 출발로 일정이 바뀐 제주행 계획표는
왜 자꾸 쳐다보는 것이냐?
제주행 가방 싸기에 벌써 나서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그것보다 더 중요하고 먼저해야할 일이 있는데 말이다.
나는 결코 슬로우 스타터가 아닌데
결국 별다른 소득없이 어제 오후를 보냈다.
할 수 없다. 오늘은 마지막 방법을 써보려 한다.
나는 집에서 일하는 것보다 밖에서 일할 때
능률이 두 배 오르는 스타일이다.
그래서 공부할때는 도서관을, 중요한 일을 해야할 때는 휴일이나 방학에도 학교에 나갔었다.
오늘은 아파트 커뮤니티센터에라도 나서야겠다.(10시에 문을 연다는 것이 함정이기는 한데...)
그곳에서 무료 커피 한잔을 옆에 두고 두 종류 강의안을 세밀하게 구성해야겠다.
대략적인 머릿속 구상은 있는데
이것을 구체화하는데는 약간은 주위를 신경쓰게 하는 근무 환경과 약간의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재택근무나 온라인 회의보다는
회사 출근과 오프라인 회의의 효과를 아직은 더 믿는다.
너무도 구식 스타일일지도 모른다만.. 어쩌겠나.
이번 생은 그냥 하던대로 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