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 한통의 힘

화요일까지는 바쁠 예정이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늘은 아침 일찍 연구팀의 줌 회의로 하루를 시작한다.

줌회의를 하면 나의 얼굴에 대한 적나라한 현실을 알 수 있어 괴롭기도 하고

요새 강의를 하지도 않는데 늘상 잠겨있는 내 목소리가 신경 쓰이기도 하고

가만히 있다가도 줌회의가 시작되면 내 노트북 화면 앞을 왔다 갔다하는 고양이 설이가 거슬리기도 한다.

(그렇게 중차대한 격식을 차리는 회의는 아니니 미리 양해를 구해놓기는 했다만

고양이 꼬리가 슬쩍 지나가면 놀라실 수 있다.

지금은 코를 골면서 아기처럼 자고 있다.)

그래도 줌회의를 하면서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과 교류한다는 느낌이 들어 좋다.

물론 아주 작은 금액의 수당도 받으니 더더욱 좋다.


그런데 회의 중에 전화가 한 통 들어온다.

물론 줌회의의 오디오는 막아두었고

휴대폰은 무음이니 전화가 들어왔다는 것만 인지했을 뿐이다.

네 명이 하는 줌회의인데 딴청을 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

모르는 번호의 전화는 받지 않고(핸드폰 번호가 아닌 경우 더더욱 그렇다.)

070으로 시작하는 번호는 더더욱 받지 않고

스팸 번호 거르는 시스템도 깔아두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치 않는 전화는 계속 온다.

원하는 전화보다 배는 더 많은 횟수이다.

그리고는 줌회의가 끝났는데 다시 그 번호로 전화가 온다.

한번 더 전화를 했다는 것은 무언가 목적이 분명하다는 뜻이다.

전화를 받았다.


얼마 전 초빙교수 지원서를 제출했던 모 대학교이다.

서류 전형에 통과되었다고

줌으로 하는 온라인 시범 강의에 참여하라는 안내이다.

얼마만의 서류 전형 통과인지 기쁘기도 하고

면접 전에 시강을 한다니 새삼스럽기도 하다.

서울에서 거리는 제법 있는 곳이지만 강의를 할 수 있다면 어디든 갈 마음이 있는 상황이고

전공이 아니라 교양 강좌라는 것이 더더욱 마음이 들었고

강좌의 제목이 <사이언스 톡>, <과학적 시대, 철학하기>, <인물로 보는 과학의 역사>, <과학적 사고와 상상력>이라는 특이한 점이 더더욱 마음에 들었었다.

지구과학탐구, 과학교육론 이런 교과 제목보다

얼마나 포용성 있고 한번 들어보고 싶다는 느낌을 주는 교과목인가?

그리고 평소에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삶과 연계된 교양으로서의 과학이라는 수업 모토와 잘 어울린다.

이것저것 내가 선택할 처지는 아니지만 말이다.


그런데 줌으로 하는 수업 시연이란다.

꽤 먼 곳까지 방문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기는 한데.

노트북을 바꿔야하나? 얼굴이 흐릿하고 힘이 하나도 없이 나타나는데. 사실은 얼굴을 바꿔야 하는 거이 맞다만...

접속 장소를 바꿔야하나? 뒷 배경이 너무 집이라는게 드러나는데(물론 가상 배경을 만들 수는 있다만 자연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커뮤니티 센터로 갈 수는 없지 않겠나...

고양이 설이를 방에 가두어놓아야 하나?

갑자기 가두어놓으면 잉잉 소리를 내고 문을 박박 긁어대면 더 신경쓰일텐데...

어떤 내용의 수업을 준비할까?

새로운 것과 자신 있는 것 중에서 어떤 것을 선택할까? 평소 내 스타일이라면 무조건 새로운 것이나 워낙 비중이 있는 강의이니 자신 있는 것으로 할까?

갑자기 다른 세상이 열린다. 전화 한통으로 말이다.


그리고는 정신없이 다음 주 막내 동생과 조카와의

제주 여행 일정을 조정하기 시작했다.

하필 제주에 내려가는 그 날 오후가 시강이다.

제주의 바다가 보이는 카페에서 원격강의를 할까 하는 낭만적인 생각을 일분 정도 했으나

이내 현실로 돌아온다.

일단 내 비행기표 시간을 뒤로 미루고(다행하게도 표가 있더라)

자동차 렌탈 픽업 시간도 미루고(본의 아니게 예산 절감이 되었다.)

첫날 저녁 식사 장소의 예약을 마지막 날 점심으로 바꾸고(언제든 먹을 수 있으면 되었다.)

막내 동생과 통화해서 먼저 도착해서 시어머님에게 인사부터 하라고 일정 변경을 강요한 후

내가 제일 좋아라하는 강의안 준비 기초 작업을 시작한다.

<사이언스 톡>, <과학적 시대, 철학하기>, <인물로 보는 과학의 역사>, <과학적 사고와 상상력>.

지원서를 쓸때까지만 해도 아무 주제나 강의해도 되는 개방성이 장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강의안을 작성하려 하니 너무 넓은 범위가 단점이 되는 듯 하다.

그래도 이번 주말 오랫만에 빡세게 준비하면 되지 않을까?

20분짜리 학생도 없는 줌으로 하는 뻘쭘한 원격 강의이지만(코로나 19 시대가 생각난다.)

나의 강의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제공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기쁘다.

갑자기 에너지 뿜뿜이 되는 기적, 전화 한통의 힘이다.

물론 전화 이후에 메일도 왔다만...

나를 찾는 전화벨소리. 너무 좋다.

그리고 이제 그 의미있는 첫걸음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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