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비가 내렸던 그 시간 동안

오랫만에 맛난 라면을 먹었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올해 장마가 시작되었다는 예보가 있었고

내일부터의 제주 여행이 혹시 장마와 만나는 것은 아닌가 싶어 며칠 전부터 예보를 살펴보았었다.

나는 그렇다고 쳐도 동생과 조카는 정말 오랜만에 가는 제주인데 제주다운 제주를 느끼게 해주고 싶다.

제주다운 제주라니. 용어가 틀렸다.

장마와 태풍으로 꼼짝 못하고 세찬 바람이 부는게 더 제주스러울지도 모르니 이 말은 취소한다. 퉤퉤퉤이다.


다른 일이 없었다면 내일은 온전히 제주행으로만 가득찼을텐데

갑자기 시범강의가 생겨서 제주행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어제는 두통이 꽤 심했고

그래도 다행하게 오늘은 괜찮은 듯하여 아침부터 부지런을 떨었다.

월요일이기도 하니 산뜻하게 말이다.

내가 집을 비울 동안 저녁에 와서 고양이 설이를 케어할 아들 녀석을 위해 침대 시트와 여름 이불을 세탁한다.

생각보다 아들 녀석은 냄새에 민감하다.

그리고는 화, 수에 아들 녀석이 먹을 반찬을 준비한다.

무엇을 해놓을까 물어보았는데 물론 괜찮다는 답이 왔지만

그래도 무언가를 해놓아야 나의 마음이 편하니 불고기 한 끼 분량, 제육볶음 한 끼 분량을 볶아둔다.

밑반찬은 알아서 찾아먹겠지.

아직 제주행 짐은 싸지 못했다.


그리고는 오늘의 단 하나 계획이 이었던 수업 공개를 보고 워크숍을 하는 일정 나들이에 나선다.

비열에 대한 중1 수업을 진행하고(올해 막 박사학위를 따고 의욕이 넘치는 후배교사가 수업 담당자이다.)

동티모르, 콜롬비아, 나이지리아 교육관계자와의 수업에 대한 워크숍이 진행될 예정이다.

나도 많이 해봤던 패턴이다.

우리나라 교육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나라의 교육관계자가 학교에 직접 방문하여 수업을 살펴보고

관련 이야기를 나누는 형태이다.

내가 보고 싶은 것은 학생들과의 티키타카가 일어나는 현장의 그리움이었지

교육에 대한 장황한 이론을 나누고 싶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연구냐 강의냐 중에서 선택하라면 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강의이다.


흐린 날씨에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학교 위치를 홈페이지에서 탐색해보니 지하철역에 내려서 마을버스로 갈아타면 된다는 것까지는 찾아두었는데(골목 골목을 돌아 산꼭대기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오래전 근처까지 가본 적은 있었다.)

지하철역에 내려 밖으로 나가는 순간 장마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는 학교 홈페이지에 공지된 마을버스 번호가 정류장에 없다.

주변이 공사중인데 무언가 변경이 있었던 듯 하다.

마을버스 13번을 타라 안내되어 있는데 마을버스 12번만 있고 그 학교에 가지도 않는다.

지나가는 택시도 없고 카카오 택시를 부르기에는 7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라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다가 결정적으로 갑자기 배가 엄청 고파온다.

오늘 무엇을 먹었나 곰곰이 생각해보니

어제 저녁 먹다 남긴 햇반 작은 것의 반 정도를 눌은밥처럼 끓여서 볶음 김치와 먹었고

나오기 전에 묵혔던 바나나를 하나 먹은 것이 기억난다.

시간을 보았더니 이미13시를 넘어서고 있다.

집에만 있을 때는 배가 딱히 고픈 줄도

내가 적게 먹었다는 느낌도 없었는데

밖에 나와 보니 에너지가 딸리는 느낌이 분명히 든다.

이래서 외출이 필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올해 들어서 처음으로 계획했던 일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을 결정하는데는 10여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고픈 배를 가지고 그곳에 가면 최소 15시까지는 행사에 함께해야하는데 민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내일의 중요한 행사인 시범강의과 제주행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염려가 포기 결정을 내리게 했다.

다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비상용 포도알 사탕을 하나 물고서 무엇을 먹을 것인가를 잠시 고민했다.

지하철역에서 집까지 걸어가는 사이에 먹을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까?

갑자기 1년에 몇 번 먹지도 않는 라면 생각에 꽂힌 것은 장마비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끓인 라면을 먹는 일도 드물지만

혼밥으로 라면을 주문해서 먹는 일도 엄청 드문 일인데 말이다.

물론 한 그릇 다 비우지는 못했다만

달걀과 단무지와 김치와의 어울림으로 맛나게 먹었다.

제주에 가서 바다를 보면서 아니면 성산일출봉을 앞에 두고서 해물라면 먹을 생각이 싹 사라질 정도로 괞찮았다.

4,500원의 라면을 먹고 나오니

나의 2시간이 사라져있었고 장마비도 그쳐있었다.

결론적으로 나는 라면을 먹으러 그 먼 길과 시간을 사용했던 것인데 그다지 아깝지는 않았다.

역시 전문가가 끓여준 라면이 최고이다.

집에서는 그 맛을 못낸다.

저 냄비 그릇 때문일까?


오늘 참석 못한 워크숍인 <현직 교사의 전문성 향상 방안>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전달 연수 들을 기회가 있을 것이다.

‘무엇을 가르칠 것인지, 어떻게 가르칠 것인지’에 관해 꾸준한 전문성 향상을 나는 평생 고민했었다.

교사의 전문성은 PCK(Pedagogical Content Knowledge), 즉 ‘교수학적 내용지식’으로 나타나는데,

이는 교과 내용을 효과적으로 가르치기 위한 교수학적 전문성을 의미하며

내일 나는 시범 강의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PCK를 최대한 표시해야 하는데 잘 될런지는 모르겠다.

재미있는 것은 내일 나의 수업을 평가할 사람들 중에 아마도 자연과학 전공자와 과학교육 전문가는 없을 듯 하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 학교에는 자연대학이나 공과대학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더욱 PCK가 중요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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