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의도치는 않았지만 갑자기 중요한 일이 생긴 오후이다.
제일 먼저 계획한 일은 6월의 제주를 보고 오는 일이었다.
마일리지 사용에 혹해서 내린 결정이었지만
학기를 마친 막내동생과
군복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가는 조카가 함께 하기로 해서 마냥 신났었다.
고양이 설이는 아들이 담당하기로 해주었으니 다행이었고
태풍이나 장마만 피하면 되겠다 싶어서 일기예보만 체크하고 있었다.
물론 제주 구옥 느낌 물씬나는 새로 오픈한 숙소도 예약해두었고
제주스럽지만 너무 특별하지는 않은 식당 두곳도 예약해두었다.
그런데 갑자기 초빙교수 지원한 모처에서
시범 강의 날자가 잡혔는데
바로 오늘 두시 이십분부터 20분간이었고
미룰 수도 앞당길 수도 없어서
모든 일정을 미루고 조정하는 아찔함을 보냈었고
오늘이 바로 그날 오후이다.
그리고 한가지가 더 있다.
내 최애 프로그램 <불꽃야구> 직관 티켓팅 창구 오픈 시각이 오늘 두시이다.
이것도 지난 주에 공식화된 일정이고
내가 바꿀수는 없는 것이다.
마지막이다 싶어서 꼭 가보고픈데
취소표나 가능했었지 티켓팅 성공율은 전무하다.
그래도 시도해보기는 한다.
오전은 아무렇지도 않게 담담하게 보냈다.
청소를 하고
아들녀석 먹을 김밥을 싸고
(물론 꼬다리는 내가 다 먹었다.)
음식물 쓰레기도 버리고
고양이 설이와 꽁냥꽁냥거리기도 하고 말이다.
한시 사십오분부터 떨림이 느껴진다.
그렇게 오래 강의를 했는데도 떨리기는 한다.
오래했다고 안 떨리는건 아니다.
유명 야구 선수들도 직관을 앞두고는 떨린다했었다.
어제 방송에서.
줌으로 하는 강의 중에 고양이가 난리를 필까싶어
일단 고양이를 열빙어로 유인한 후
최애 장소인 아들방 드레스룸으로 안착시켜둔다.
한시 오십분부터는 휴대폰으로 티켓팅 창구에 들어가서 새로고침 신공을 시도한다.
노트북은 줌 회의에 접근 가능하게 세팅하고
오늘의 강의 PPT 자료를 열어둔다.
두시 땡하자마자 티켓팅을 눌렀는데
벌써 대기번호가 5,000번에 육박한다.
틀렸다. 신의 손들이 그렇게 많구나.
혹시하고 오분간 기다려보다가 장렬하게 포기한다.
두시 십오분에 줌 회의 자료에 들어가서 대기하다가
십구분이 되니 회의창이 열린다.
다행히 시강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고
질의 응답도 그럭저럭 마쳤고
염려했던 고양이 설이는 거실에 얼씬하지도 않았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했으니
운명에 맡길수 밖에.
고양이 설이를 거실로 내어놓고 궁디팡팡을 세 번 해주고는 제주행 출발을 위해 집을 나선다.
9호선 특급을 타고 편안하게 김포공항에 도착했는데
톡이 들어온다.
금손 지인님이 직관 티켓을 구했다는 톡이다.
티켓값을 보내고 동행할 후배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고 이제 일요일에 승리요정이 출동하면 된다.
그리고는 또 톡이 들어온다.
비행기 출발이 십오분 정도 지연된다한다.
괜찮다. 멋지게 비행기 보이는 카페에서
햄치즈바게트와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즐기며
오후 브런치를 쓰면서 대기하면 된다.
휴대폰 충전은 덤이다.
그리고는 비행기에서는 아마도 꿀잠을 잘 예정이다.
제주에서 기쁜 소식을 받는다면
더더욱 바랄게 없겠다만.
아니어도 이제 절망하지는 않으련다.
재취업의 기로에 선 나도
어제 그 이쁜 아가씨를 만난 아들도
운명론에 심취하고 있다.
될거면 되겠지. 내 것이면 나에게 오겠지.
시간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흘러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