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디 달고 단 낮잠

오랫만이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규칙적인 일을 하지 않으니 밥맛이 없고

밥을 잘 못먹으니 체중이 떨어지고

규칙적인 일이 없어 몸이 힘들지 않으니

밤에 잠이 쉽사리 잘 오지 않고

안좋은 생각은 꼬리게 꼬리를 물고 계속 뒤척이다가

두 시간에 한번씩 깨는 그런 스타일이 퇴직 후 일상이 되어버렸다.

물론 가끔 아르바이트를 할 경우 일의 경중에 따라

그리고 그 이후의 주변 산책 여부 등에 따라 푹잠을 잔 며칠도 있다만...

나의 컨디션에 가장 중요한 요소를 고르라고 하면 나는 잠과 화장실이라고 주저없이 답할 것이다.


낮에도 비슷하다.

깨어있는 시간은 적어도 출근해서 있는 시간만큼은

똘망똘망과 에너지 활용율 100%를 자랑하던 나는 어디로 가고

딱히 무엇을 하는 것과 하고 있지 않는 것도 아닌 것 같은

헤벌레한 상태로 있을 때가 종종 있다.

<무슨 일을 하려면 제대로 하고 아니면 자는 게 낫다>는 평소의 신조를 지키기도 힘들었다.

낮잠이래도 자려고 누워도 잠은 오지 않고

뒤척뒤척거리며 핸드폰만 보다가는 다시 일어나곤 했으니 말이다.

이럴 때를 대비해서 소파가 필요한 것인가 생각했다.

자는 건 아닌데 일하는 건 아니고 딱히 해야 할 일이 없을 때 누워있는 공간으로는 소파가 딱인데

이 집으로 이사 온 3년간 소파는 없다.


고양이 설이가 갉아놓은 가죽 소파를 버리고 왔었다.

그리고 고양이 설이 때문에 다시 소파를 구입할 엄두를 못내고 있다.

그렇다고 가죽이 아닌 소파를 하자니 가격뿐만 아니라

그것도 설이가 건드리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서 구입을 마음 먹지 못하고 있다.

지금 있는 식탁 의자 두 개도 옆구리 부분을 갉아내어 버리기 일보 직전인데

고양이를 키우는 다른 집들은 어떤지 모르겠다.

비법을 아시는 분들은 댓글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다.

스크래치를 몇 몇 개 두었지만 사이즈가 작아서인지, 강도가 자신의 성에 찰 만큼의 정도가 아니어서인지

그다지 설이가 좋아라 하지 않는다.

소파에 비스듬히 누워서 TV 도 보고 낮잠 비스무리한 잠도 자고 하는 그런 생활을 못한지 3년차이다.

그 느낌이 이제는 살짝 그리워지고 있다.

잠 때문일지 포근함 때문일지 아니면 두 개 다 일지는 알 수 없다.


원래 나는 주말 낮잠을 좋아라 하는 스타일이었다.

주말 낮잠을 푹 자고 나면 힘이 나면서 다음 주 계획을 가열차게 세우고

주말 저녁 특식과 다음 주 반찬을 준비하는 등

주말 마감을 기분좋게 끝내고는 했다.

가끔은 너무 많이 잤는지 두통이 오는 날도 있었지만.

오늘은 그런 날이었나보다.

오전에 2학기 강의 나가는 대학교의 비교과프로그램 계획안을 제출하고

(중고등학교에서의 동아리 활동 지도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 활동에 필요한 온라인 전시 플랫폼을 찾아보고

그 내용과 관련해서 많이 사용해본 후배교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특강 날자도 맞춰보고

7월에 두 번 예약되어 있는 골프 모임에서 너무 헤매지 않으려고 연습을 한 시간 하고

(특히 한 번은 제자들과의 라운딩이니 신경이 조금은 쓰인다.

늙어서 추레해진 모습을 보이는 것도 공을 못치는 모습을 보이는 것도 마음에 걸린다.)

매일 하는 산책을 약간은 다른 경로로 시도하고

(매일 조금씩은 다른 경로이다만 오늘은 최근 만들어진 에코센터를 보려는 목적이 있었지만

하필 일요일은 휴관이더라.)

점심까지 먹고나니 졸음이 몰려왔다.


그런데 얼마나 곤히 잤는지 설이가 나를 깨우는데도 눈을 뜨지 못했다.

심지어 머리를 박아대다가 뭔가 하고 싶은게 있을때만 내는 소리까지 내면서 나를 깨웠는데

나는 설이에게 신경질까지 냈다.

곤히 자는데 왜 깨우는 거냐고...

기말고사 시험공부를 하다가 낮잠을 자는 나를 엄마가 깨우시면 가끔 내가 그렇게 화를 냈었다.

그러면 엄마는 지 덜 힘들라고 깨워주는데 왜 화를 내냐면서 삐지시곤 하셨다.

오늘 설이도 삐진 듯 하다.

나 같아도 삐질 듯 하다.

그런데 오늘 낮잠은 오랜만에 달디 달고 달았다.

딱히 꿈을 꾸지는 않았는데 푹 잤다는 기분이 들었고 시간이 꽤 지나가 있었다.

문제는 이제 고양이 설이가 삐져 있다는 점이다.

내가 가도 쳐다보지도 않고 소리없이 엎드려있다.

눈꼽을 닦아줘도 킁하고 표정 변화도 없다.

할 수 없다. 극약 처방 츄르로 유인하는 수 밖에...

어차피 여섯시에 줄 츄르를 시간을 조금 당겨서 지금 주는 것으로 화해를 시도해보아야겠다.

나에게는 오랜만에 달디 달고 단 낮잠이었는데

고양이 설이에게는 조금은 충격이었나보다.


(이 글을 마무리할때쯤 설이가 나에게 다가와주었다. 나는 얼른 궁디팡팡 세례를 퍼부어주었다. 화해 끝.

대문 사진은 고양이라고 생각해서 골랐는데

다시 보니 원숭이였다. 설이 사진 잘 나오게 하나 찍어둬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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