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일 연장자가 꼭 위원장을 해야 하나요?

제일 연장자라는 것을 받아들이기도 아직 힘들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오늘은 남산 꼭대기에 있는 모처에서 심사 아르바이트가 있는 날이다.

개인적으로 남산을 무지 무지 좋아라하고

오늘 심사하는 그곳과 연관된 기관에서 근무를 하기도 했고

남산 인근에서의 체험활동 인솔도 많이 했었으니

나름 익숙한 공간이라 생각되는데

오늘은 영 지하철역에서부터 걸어올라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날씨와 컨디션이 그랬다.

어찌 할까 하다가 신용산역에서 후암시장 입구까지 가는 버스가 있다는 것을 생각해냈다.

아직 죽지 않았다. 내 기억력이...

신용산역 지하와 연결된 아모레빌딩 지하는 점심시간 식사를 하는 직장인들로 만원 사례였다.

다들 싱싱하고 멋지고 젊었다.

나는 왜 오늘따라 축 늘어진 나시 원피스를 입고

그 위에 니트 가디건을 입었던 것이냐?

가뜩이나 까맣게 탄 피부와(불꽃야구 성남고 1차전 직관에서 이리 되었다.)

흰 머리가 벌써 보이는 머리와(염색한지 한 달이 채 안되었다.)

깊은 눈밑 주름이 오늘따라 더더욱 나를 늙어 보이게 한다.

어제 야구 직관이 힘들었었나보다.

마음을 졸였고 너무 박수를 많이 쳐서 손가락도 아프다.


심사위원은 총 8명이다.

그 중 한 명이 심사위원장 역할을 한다.

역할은 별 것이 없다.

안내 매뉴얼대로 읽기만 하면 되고 나중에 최종 문서에 사인을 하면 된다.

수당을 조금 더 주는 것도 절대 아니다.

지금까지는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지난번부터 자꾸 나보러 심사위원장을 하라고 한다.

한번은 번호순대로 앉았는데 자리가 하필 중앙이어서 였고

한번은 사기업 면접에서 최고령자라고 면접 심사위원장을 했는데

(요새 심사위원을 나이 많은 사람 쓰지 말아달라고 기업에서 요구한다고 한다. 그때도 엄청 당황했었다. 처음하는데 위원장이라나...)

오늘 또 서로 안한다고 하니 최고 연장자가 심사위원장을 하라고 하는데 놀랍게도 그게 바로 나였다.

나만 놀랬나? 분명 나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남자분이 계셨다만...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나보다.

그때부터 급 피곤함을 느끼게 된 것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다행히 업무 매뉴얼을 안경을 벗지 않고 읽을 수 있는 나의 노안 상황에 안도하고

다른 때보다 더 세분화해놓은 점수 배점에 약간 분노하고

(아니 소수 둘째자리까지가 웬말이냐? 그렇게 세분화할만큼 정교하게 점수 차가 나지도 않는다.)

오늘따라 더하기가 느린 업무 담당자들을 그러려니 하고 보고 있자니

(아니 왜 엑셀 공유문서하나를 안쓰는 것이냐.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렇게 두 시간을 보내고 나니 피곤과 졸음이 더더욱몰려오면서

(심사가 힘들었다기보다는 더운데 남산에 올라가고 내려오는 과정이 힘들었을 것이다.)

저녁 지인들 모임인 오목교역에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거의 20여명이 되는 큰 모임이니 나 한 명 빠져도 티가 안나 다행이고

그곳에서 나는 아직 어린 편이라 심부름을 해야 되는 모임인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도 제일 큰 이유는 지난주부터 7월말까지 일정이 너무 빼곡하여 컨디션 조절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오늘 모임의 주선자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귀갓길을 선택한다.

제일 연장자가 꼭 심사위원장을 해야하는 법은 없다만

이 나이에 너무 무리하여 연예인 수준으로 일정을 소화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나저나 내가 제일 나이가 많다니...

정말 놀랍고 슬픈 일이다.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힘든데

오늘 남산 주위의 구름은 내 속도 모르고

어느 방향으로 찍어도 예술 사진이다.

오늘은 화요일 같은 마음이 드는 월요일이었다.

요새는 날짜는 잘 모르겠고 요일만 기억난다.

나이탓이겠지 그렇게 받아들이면 안된다.

2025년 7월 21일 월요일이다.

치매 판정 인지 테스트 첫번째 서술형 문항의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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