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당할 용기

가슴 쪼이는 일이 싫다.

by 태생적 오지라퍼

아들 녀석과 나의 큰 성향 차이 중 하나는 스포 수용 여부이다.

스포츠나 방송 컨텐츠에 대해 미리 그 결과를 아는것을 극도로 싫어한다.

흥미와 집중력과 쪼이는 맛을 잃어버리게 된다나.

아니 노름하는 사람들이 마지막 화투판이나 카드 하나를 가지고 쪼이는것은 드라마에서 봤다만

나는 생각만으로도 그런 상황이라면 머리 뒤 꼭지가 쭈뼜선다.

드라마에 나오는 아 하는 외마디 지르고 뒷목잡고 쓰러지는 경우에 해당되는것 아니냐.

여하튼 난 그런 상황을 가급적 피하고 싶은데

아들 녀석은 즐긴다니

같이 영화를 보거나 방송을 보기에는 스타일이

영 맞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미리 스포를 보고 나서

이긴 것이나 주인공이 죽지않는 해피엔딩임을 확인 후

못본 척하고 아들과 그 콘텐츠를 시청하는 편이다.

절대 아무 말도 어떤 티도 내면 안된다.


어제 저녁에는 나름 집중할 일이 있었다.

이 일을 위해 강의 준비도 네 시에 마쳤고

경건하게 목욕 재개도 마무리했고

남편의 산책 가자는 제의도 정중히 거절했다.

내 최애 <불꽃야구> 직관일 경기 스포를 달리기 위해서이다.

스포 방지의 취지가 시청률이 낮아지는것 때문이라면 걱정마시라.

나는 이긴 경기를 신나서 수없이 돌려보는 편이고

진 경기는 가슴이 무너져서 못본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든 아니든 실책을 하고

하늘이 무너지는 표정을 짓는 그들을 보는게

마음이 너무 아프다.

물론 국가대항 경기빼고 말이다.

그때는 무조건 우리가 이기기를 응원하고

상대편 국가 선수의 아픔에는 눈을 질끈 감는다.

애국심과 차오르는 국뽕 탓이다.

아마 나같은 성향인 사람들을 위해서

일부 친절한 분들이 어둠의 경로에서 조금씩 스포를 해주는거지 싶다.

사실 경기보랴 응원하랴 탄식하랴 바쁜데

한 줄 글을 남겨준다는건 쉽지 않다.

제작진들 죄송. 스포해주시는 분들께 감사.

사랑하는 방식이 다를 뿐.

<불꽃야구>를 진심으로 애정한다.


어제 경기시간 내내 안절부절 새로 고침을 해대면서

스포당할 용기를 십분 적극적으로 발휘했다.

그리고나서 댓글 찾아보기까지 했더니

기운이 쫙 빠져서 꿀잠에 들었고

눈을 떠보니 새로운 한 주일의 시작이다.

오늘은 남편이 열 네번째 항암주사 맞는 날이고

매번 그랬듯이 별일 아니라는듯 담담하게 배웅을 했다.

남편의 투병 결과는 절대 스포당하고 싶지않다.

그냥 그도 나도 최선을 다하고

결과를 겸허하게 기다릴 뿐.

어제 <불꽃야구> 스포때처럼 일희일비 하지는 않겠다.

오늘 석촌호수는 여전히 아침 운동하는 건강한 사람들로 가득이고

나는 두유 하나를 마시면서 느 벤치에서 이 글을 쓴다.

자꾸 날벌레가 들러붙기 시작한다.

이제 몸을 움직여야겠다.

셔틀버스 탑승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