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꾸 옛 생각이 난다.
초등학교 시절 바른 글쓰기 대회가 있었다.
누가 누가 글씨를 예쁘고 단정하게 쓰느냐를 겨루는 것이었다.
대회의 필요성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글을 잘 이해하고 쓰는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지 이쁘게만 쓰는 것이었는지
아무튼 지금 기억으로는 네모칸이 그려진 원고지 형태 종이 한 장에 글을 써서 내면 상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나는 상을 종종 받았을 것이다.
내 글씨체는 이쁘고 단정하고
게다가 빠른 시간안에 다 썼으니
아마 누가 빠르게 쓰는가를 측정했다면 단연 1등이었을 것이다.
한때 빠르게 글만 쓰면 되는 것인줄 알고
속기사가 나의 길인가 했었을 정도이다.
그때 그 이뻤던 글자씨체는 어디갔을까?
이제는 손의 힘이 딸리는 것인지
컴퓨터만 사용해서인지 글씨를 쓰려면 힘이 들고
나의 글씨체는 누가봐도 소위 날림체가 되었다.
그때 그 기억인지는 모르겠지만
컴퓨터 작업을 해도 끌리는 글자체가 있다.
책도 상품도 글자체에 먼저 눈길이 간다.
타이포그래피의 힘이기도 하다.
브런치의 초고는
내 컴퓨터에서는 휴먼고딕체로 작성한다만
그러면 뭐하나 브런치의 글자체는 정해져 있다.
나는 나눔바른고딕체로 제목을 선택한다.
휴대폰으로 작성할 경우는 선택이 더더욱 제한적이다.
오늘 아침 작업한 연구보고서 메모달기는 함초롬돋움체를 사용하였다.
작은 글씨가 오목조목하니 이쁘고 간결하다.
이번 학기 강의 자료 PPT는
전문가의 추천을 받아
제목은 여기어때잘난체로
내용은 여기어때잘난체고딕을 주로 사용한다.
더 작은 글씨는 학교 안심 산뜻도움을 쓰기도 한다.
글자체의 저작권문제가 선택의 중심이 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간결, 깔끔 그리고 보는 사람의 편의성을 고려한다.
요즈음 강의는 컴퓨터마다 깔려있는 글자체가
다 달라서 깨지기 쉽상이라(그걸 견디기 어렵다.)
모든 파일을 PDF 형태로 만들어 다니는 습관이 생겼다.
악필이라고 소문났던 사람들은 이제는 마음이 편할 듯 하다.
글을 직접 써야할 경우가 점점 줄어드니 말이다.
가끔씩 서명을 할 경우가 있지만 서명은 흘려쓰는 것이 더 멋지기도 하고
유니크해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마지막 학교 야구부들은 가끔씩 자기가 유명한 야구선수가 되었을때에 대비하여 사인 연습을 하곤 했었다.
도저히 뭐라 썼는지 알아볼 수도 없게 해놓고는 의기양양해했다.
누구 사인인지는 나중에 알아보게 해야할 것 아니냐고 훈수를 두면
꼰대 취급을 하면서 이게 멋진 거라고 웃곤했다.
그런데 글자의 가장 기본은 다른 사람이 알아보는 것 아닌가?
나만 알아보는 글자는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암호문 만들기도 아니고 말이다.
교사가 되어서 결재 처리를 위한 문서나 시험 문항을 만들 때
교장 교감 선생님들이 메모를 달아주거나
스티커를 붙여주거나 혹은 빨간펜으로 수정을 해주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은 모두 컴퓨터 작업이니 반려하거나
직접 수정하고 알려주지만
예전에는 수정 과정이 다 수작업이었으니
의견을 알려주는게 당연했다.
누군가는 교장 선생님이 빨간펜을 쭉 그어놨다고 눈물을 흘리며 분해하기도 했지만
그 방법이 눈에 가장 띄는 방법이기는 하다.
적어놓은 글자가 무엇인지 알아볼수만 있다면 말이다.
뭐라 적었는지 알아볼 수 없는 경우에는 그분을 면담해야되는 과정이 추가로 생기게 된다.
단정한 글자체가 일을 편하게 만들어주었었다.
그리고 그런 작업을 통해 누구의 글씨인지도 대충
다 알게 되었었다.
직접 글을 쓰고 지냈던 그 시절이 이제는 까마득하기만 하다.
그렇게 열심히 보았던 내 아들의 글씨체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내 기억에는 친정아버지의 멋진 글씨체와
치매로 힘들어지면서 일기를 써내려갔던 엄마의 글씨체만 남아있다.
그리고 얼마전.
오랫만에 남편의 글씨를 보고 화들짝 놀랐다.
기억에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글씨체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항암약 때문에 손이 곱고 저려서 변형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만.
그리고 놀랍게도 내 글씨체와 비슷하게 닮아있다는 것 또한 충격이었다.
그렇다면 어르신체가 따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렸을때 선생님이 해주신
<글씨가 그 사람의 거울>이라는 말이 맞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울 속의 내가 늙었듯 글씨도 늙었다.
(이 글을 읽고 막내가 ... 혹은 물결표시등을 쓰지말라 조언해주었다. 톡에서도 많이 썼다만. 노땅들만 하는 거라고. 앞으로 쩜쩜쩜은 절대 사용하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