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잡는다고 잡아지는 것은 아니겠다만.
네 시간의 강의를 마칠 무렵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예보를 보고 온 터라 당황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급 울적해진다.
비가 내리기만 하면 자동적으로 멜랑꼬리의 극치를 달리는 내 감정은 주광성이 틀림없다.
해가 반짝 나야 작동하는 에너지와 열정이다.
(태양광 패널과 동급인가보다.)
그래도 강의를 마무리하고 에너지가 꺼졌으니 다행이다만 아직 비교과프로그램이 기다리고 있다.
컴퓨터에 줌도 깔아야 하고
외부 강사님에게 수업 자료도 받아야하고
프린트도 해야 하고 이른 저녁도 먹어야 하는데 말이다.
일단 이번 가을비에 떨어져나갈 꽃잎들이 걱정이다.
그들의 운명일지도 모르지만 식물에 붙어있는 잎과 떨어져서 바닥에 나뒹구는 잎이 주는 느낌은 천지차이다.
마치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요양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이랄까?
한때는 찬란했고 더없이 멋진 봄과 여름을 굳건하게 보냈던 잎들을
아직 보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데 말이다.
나이가 그래서인지 낙엽을 보면 그렇게 눈에 밟힌다.
봄비는 계절을 재촉하고 개화를 북돋는 느낌이라면
가을비는 계절을 재촉하기는 하지만
낙과와 낙엽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런 것 같다.
이제 이 가을비가 지나가고 나면
평균기온 20도를 유지하는 일도 쉽지는 않을 듯하니 더더욱 슬프다.
나의 체감 따뜻 기온 마지노선은 20도이다.
점심까지는 냉면이 먹고 싶었었다.
맛없는 빵으로 점심을 때우고 사무실에 올라와보니
푸드 전공이 하는 별식이 기다리고 있었고
대부분은 빵이었으나 냉면이 포함되어 있는것을 보고는 갑자기 침이 꿀꺽 삼켜졌었다.
화, 수 점심만 한다는데 나는 계속 수요일마다
점심을 강사휴게실에서 때웠으므로
오늘에서야 이 사실을 안 것이다.
배가 부르니 오늘은 도저히 못먹겠다 싶어서
다음 주를 기약해보는데 가을비가 내리고 급서늘해지는 기온을 맛보고 나니
다음 주에 냉면을 먹고 싶겠나 의심스러워진다.
날씨 변화에 제일 민감한 것이 입맛이다.
비가 오는데 날이 추운데 냉면을 찾게 되지는 않는다.
나는 그렇다.
오늘 이 비 예보 때문에 얇은 면바지가 아닌
두께가 꽤 있는 청바지를 입고 출근했다.
이제 얇은 면바지와 얇은 셔츠는 못 입는 계절이 온다는 것을 실감한다.
아직은 두꺼운 옷을 입고 싶지는 않는데
이미 이번 주부터 양말을 착장하고 운동화를 신는 삶이 시작되었고
오늘 내일 가을비로 두꺼운 면바지와 따뜻한 조끼와 함께하는 내 동계 의상 스타일의 시작점이 될 것이 분명하다.
벌써 그 끔찍했던 태양을 그리워하게 될 줄은 몰랐으나(사람 참 간사하다.)
가을비보다는 가을 태양과 높은 구름이 더욱 좋다.
곡식이 익는데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과 같다.
조금만 조금만 가을비가 내렸으면 좋겠다.
조금만 조금만 천천이 가을이 진해졌으면 좋겠다.
오늘 비예보로 천체 관측도 다음주로 미뤘는데 말이다.
(대문 사진은 모교수님께서 가져다주신
청귤과 햇대추이다.
이것들이 익은 것을 보면 결실의 계절 가을이 맞는데
왜 나는 가을은 순삭하고 겨울이 오는 것을 겁내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