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내 앨범과 편지는 브런치이다.
이사 한번 할 때마다 짐을 정리하고 버리고 하지만
그 과정에서 추억도 함께 정리하게 된다.
미니멀리즘의 최고봉은 아마 쌓아두었던 추억을 정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나는 추억 비워내기의 한 가지 방법으로 브런치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만
원래 사진 찍는 것을(내가 찍히는 것을) 엄청 싫어하는 스타일이라
사실 앨범이라고는 별로 없기도 하고
이미 웬만한 것은 다 버렸지만
어제 나의 마지막 앨범을 정리했다.
강의 자료 준비하기에는 이상하게 효율이 오르지 않았고(그런 날이 있다.)
두 개의 연구 관련 일은
하나는 대표자의 컨펌을 기다리고 있고
내가 대표자인 하나는 목요일 킥오프 회의를 하고 난 뒤 시작하자 마음을 먹었었다.
대표의 욕심으로 일을 너무 키워서 연구팀원들을 힘들게 하고 싶지 않아서이다.(나 좀 멋진 리더인가?)
그러다보니 오후 다섯시 반에서 남편 저녁을 차려줄 일곱시 반까지 딱히 할 일이 없는거다.
그렇다고 낮잠 자기도 애매모호한 시간이고
멀뚱멀뚱 티비보는 스타일도 아니고
그럴 때는 몸을 쓰는 짐정리가 최고라는 멋진 판단을 내린다.
세탁 돌려놓은 간절기 옷도 싸두고(추워져서 도저히 못 입을 듯하다.)
또 버릴 것이 없나 주섬주섬 서랍을 열어보다가
마지막 남은 하나의 앨범이 눈에 뜨였다.
잠시 주춤했으나 서울도 떠나는 마당에 이걸 굳이 가져갈 필요가 없겠다 싶었다.
아들 녀석 서너살 때 에버랜드와 롯데월드, 수영장과 눈썰매장에서 찍은 사진들과(그 당시 핫플들이었다.)
나의 결혼식, 석사, 박사 졸업 사진들이었다.
아주 이쁘게 아들만 나온 사진을 빼고는 모두
눈을 질끈 감고 찢어버린다.
결혼식 사진을 한번 들여다보니 시어머님빼고는
이제 모두 안계신다는 현실 자각이 든다.
이것도 찢어버린다. 뭐가 중한디 싶은 생각이 든다.
아직도 내가 봐도 신부화장이 과하고 촌스럽기 그지없다.
46kg인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62kg 이었던 때의 나는
(60kg은 안넘는다고 스스로에게 주술을 걸었을 때였지만 오늘 과감히 고백한다. 누가봐도 넘었을 것을 알았을게다.)
딱 벌어진 등판에 터질듯한 얼굴이기는 하다.
그 젊은 시절에 지금 몸매였다면 일생이 바뀌었을라나 매번 해보는 쓸데 없는 생각 중 한가지이다.
이렇게 내 얼굴을 남기는 사진 찍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내가
어쩔 수 없이 사진을 찍는 경우는 학교에 있을 때 졸업 앨범용 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물론 이동한 학교에 가서 한번 찍고 그것으로 4~5년을 버티기는 했다만.
예전은 그렇다고 치고 지금도 왜 졸업 앨범을
아날로그 형태로 만드는지는 이해할 수 없다.
전자 앨범이라면 몰라도 말이다.
졸업 앨범을 이용한 다양한 안좋은 행위가 벌어지고 결국에는 찢어지고 파손되고 버리게 되어 있다.
값도 싸지도 않고 무겁기도 하다.
예전에는 그 앨범 뒤에 연락처까지 명시해두었으니
개인정보라는 개념에 얼마나 뒤쳐져 있었던 것이냐?
실제로 졸업식날 밤 12시.
집으로 전화해서 나에게 <니가 최진실이냐?> 라고 속삭인 학생도 있었다.
미안하다. 사과한다.
수업 시간에 졸음도 깨우고 빠른 이해를 위해서
당대 최고 여배우 이름을 몇 번 사칭하곤 했었다.
그리고는 한권씩 선생님들에게도 앨범을 준다만
이미 오래전부터 나는 받지 않았다.
집에 쌓아둘 공간도 없을뿐만 아니라 결국
오늘처럼 버리는 날이 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앨범을 정리하는 것은 추억을 정리하는 일인셈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이제 나에게 인화한 사진이란
여권용이나 학교에서 찍었던 증명사진 몇 종류와
부모님과의 돌사진 그리고 나 어릴때와 아들 녀석 어릴 때 몇장의 사진만 상징적으로 남아있다.
그리고 탄력 받은 김에 편지도 정리했다.
주로 올 정년퇴직을 앞두고 보내준 편지와 엽서들이었는데(눈과 마음에 충분히 담아두었으니 되었다.)
기억도 못했었는데 첫사랑이 보내주었던 편지가 3개 남아있더라.
두 개는 생일 기념이고(우리 둘은 생일이 같은 날이다.)
하나는 첫사랑이 먼 지방에 잠시 다니러 갔을 때 보내주었던 것이다.
그 편지가 나를 얼마나 가슴 뛰게 했었는지
그 편지의 주소만 가지고 그를 찾아나섰던
그날의 용기와 기백은 어땠었는지
이제는 거의 잊었다만은
어제 그 편지의 그 낯익은 필체는 한 눈에 알아보았다.
다시 한번 읽어보지는 않았다. 그냥 버렸다.
다시 읽어보기에는 40년의 시간이 흘렀다.
이제 버리는 것이 하나도 아쉽지 않았다.
40년을 가지고 있었을거라고는 그도 몰랐을거다.
그렇게 추억의 한 페이지가 이제야 깨끗하게 정리되었다.
이사는 이렇게 많은 것을 정리할 기회를 강제로 부여해준다.
좋다. 어차피 해야할 일이었다.
오늘은 또 새로운 오늘의 해가 뜬다.
(많이 추울라나? 걱정이 조금 되기는 한다만 중무장 예정이다라고 쓰고 출발했는데 생각보다는 바람이 세지는 않다. 버틸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