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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cent Jan 16. 2022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

일본 가나가와현에 위치한 고교 농구부 이야기를 다룬 슬램덩크는 첫 연재를 시작한 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이들에게 회자되는 만화입니다. 만화 <슬램덩크>는 주인공인 빨간 머리 '강백호'가 북산고등학교 농구부 주장 '채치수'의 여동생이자 농구를 좋아하는 애호가인 '채소연'의 권유로 농구를 시작하게 되면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농구공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그였지만, 타고난 신체능력으로 뜬금없이 발현되는 그의 천재성은 풋내기의 성장기를 바라보는 독자들에게 충분한 쾌감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래 봤자 강백호는 풋내기일 뿐입니다. 그는 매 경기에서 마주하는 수많은 경쟁자들로부터 자신의 한계를 간파당합니다. 그로 인해 그는 큰 좌절감을 맛보기도 하죠. 그럼에도 강백호는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그는 진정으로 농구를 좋아하게 돼버렸기 때문입니다.


슬램덩크

 슬램덩크에는 '강백호'만 나오지 않습니다. 북산고등학교 농구부의 팀 동료들, 그리고 가나가와현에 존재하는 능남 고교, 상양 고교, 해남 고교 그리고 전국대회에서 마주하는 또 다른 고교팀들까지 그 팀 안에 속한 매력 넘치고 개성 강한 '캐릭터'들은 주연급 조연으로서 주인공 강백호와는 또 다른 매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옵니다.


 슬램덩크가 지금까지 회자되는 가장 큰 이유는 이들이 만들어내는 명장면들 때문입니다. 수많은 캐릭터들이 농구코트를 배경으로 씨줄과 날줄이 되어 만들어내는 멋진 장면들은 슬램덩크를 '명작'의 반열로 올리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기도 했습니다.


슬램덩크


  '이야기'가 가진 힘이 으레 그렇듯, <슬램덩크>라는 맥락 속 명장면은 수많은 사람들이 시간을 두고 다시 읽으면서 깊이감을 더하고, 생각지 못했던 것을 생각하게 되고, 이전에는 크게 관심을 갖지 않던 장면에 눈길이 가게 되는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짤'이라 불리는 '장면 인용'은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다양한 맥락으로 재편집되면서 유머러스한 이야기 흐름을 몰고 오기도 합니다. 다양한 이야기 맥락 속에서 다르게 짜깁기되는 장면의 힘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옵니다.


 그중에서 '자조'의 형태로 사용되는 장면 중 가장 유명한 '짤'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북산고등학교의 감독 안한수의 대사입니다. 한때는 '호랑이'라고 불릴 만큼 혹독한 훈련과 매서운 코칭으로 이름을 떨치던 그는 과거 자신의 제자가 불행한 결말을 맞는 것을 경험하고서는 커다란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슬램덩크


 대학농구에서 실력이 좋았던 '조재중'군이 쉼 없는 훈련과 철저한 팀플레이 농구에 싫증을 느끼며 돌연 미국행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히도, 미국 대학리그에서 주목을 받기는커녕 팀에서 소외가 되고 적응하지 못하면서 그는 결국 오토바이 사고로 생을 마감합니다.



 "전혀 성장하지 않았어"라는 대사는 안한수 감독이 수소문 끝에 '조재중'군의 행방을 알게 되어 미국에 직접 찾아가 그의 경기를 보며 한 말이었습니다. 더 넓은 무대에서 자신의 기량을 발휘하고자 했던 그의 바람과 달리 안한수 감독 눈에는 성장한 것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죠.

 


  이 서사에는 '단점을 보완하려 하지 않고 자만하면 일을 그르친다'는 동북아시아 문화권의 사고방식이 드러나기도 하면서, 강압적이고 조직문화에 사로잡힌 경직된 사고를 지적하는 메시지가 담겨있습니다(나무 위키). '조재중'군은 자신이 놓치던 것을 몰라 자만해버렸고, 안 감독은 걸출한 선수를 강압적으로 몰아세우고 억누르는 바람에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했던 것이죠.


 그런데 이렇게 다층적인 맥락이 담긴 저 대사가 다른 맥락에서 사용된다면,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옵니다. 일종의 '자조적인 유머'로서 사용되는 것이죠.


"학년은 올라가는 데 성적이 오르지 않아..."

"나이는 들어갔는데 전혀 어른이 된 것 같지 않아..."

"나 이제껏 뭐하고 산 거지...?"

 

같은 의미로 소비되곤 합니다. 자매품으로 "전반은 버린 거냐?"도 있습니다.


중간고사/1학기/2학년/인생의 전반부...... 점차 규모를 넓혀가며 우리가 겪는 숱한 제자리걸음들을 다독이며 후반을 도모한다는 의미를 담은 이 '장면 인용' 역시 '자조적인 유머'로 소비됩니다.


 

 사실 '자조'라는 것이 마냥 웃기기만 하진 않습니다. 사실상 자기 자신을 낮춰서 파악하는 경향인데, 우리가 이토록 웃음을 지으며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었을지 궁금해집니다. '자존감'지키기가 화두로 자리 잡은 시대에서 이러한 유머 코드가 만연할 수 있는 이유가 과연 무엇 때문인지 의문스러워졌습니다.



 만약 만화의 장면이 아니라 내 주변 가족 혹은 지인들이 나에게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했다면 그때도 마냥 웃으며 넘길 수 있었을까요?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저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차마 말은 못 하겠습니다)


"니들이 뭔데 날 판단해?!"


https://goodtip.co.kr/348


우리가 자조의 의미로 사용하는 이러한 짤은 일종의 '자기 객관화'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는 이유는 '짤'이 속한 '진짜 맥락'이 무엇인지 알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실상 어떤 내용인지는 모를지라도, 그것이 나를 향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만화'의 한 장면이라는 정보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는 거죠. 이러한 장치는 메시지와 나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만들어냅니다. 어린 시절 TV를 너무 가까이서 보지 말라는 엄마의 매서운 잔소리가 생각납니다.


 그러니까 그 메시지를 거리를 둔 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죠. 여유가 생긴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메시지가 '나한테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 것인지 살펴볼 수 있는 여유 말입니다. 이와 달리 누군가가 나를 상대로 직설적으로 던지는 메시지와 나 사이의 거리는 너무나 가까울 때가 많습니다. 메시지를 받아들이기 전에 공격을 받는다는 느낌이 더 강하게 드는 경우가 많죠.


 모두 저마다의 삶의 맥락이 있듯이, 내 삶을 온전히 알지 못할 것이 뻔한 타인이 건네는 충고에는 다양한 삶의 맥락을 담아낼 여유가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즉 말하는 사람의 '편견'이 섞여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충고들을 쉽사리 받아 들기고 살피기보다 우리 자신을 지켜려는 방어기제를 작동하게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사용되는 '자조적인 유머'는 조금은 이해가 될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짤'을 통해 자신의 웃픈 상황을 표현하는 것은 '거리두기'를 위한 것으로 살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거리를 재는 유용한 척도 중 하나는 '유머'가 될 것입니다. 우리가 미소 지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한 메시지일 때 우리는 그것을 그것 자체로 살필 수 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봤습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메시지를 전하는 입장일 때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상대방에게 최대한 재미있는 유머를 섞어 전달할 수 있다면 상대방으로 하여금 메시지를 온전히 생각해볼 만한 여유를 갖출 수 있는 거리를 두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물론 지나친 농담으로 상대방을 곤혹스럽게 한다거나, 농담을 받아낼 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에게는 상당히 조심스러워해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면 탈룰라처럼 말이죠.



 그럼에도 언제나 유머를 잃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May the Humor be with you!!!(유머와 함께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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