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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ncent Oct 15. 2023

미스터 구지

"굳이...."


 그는 내가 하는 사소하고 뜬금없는 제안에 "굳이"라는 말로 거부반응을 보인다. 어디까지나 "제가 해봐서 아는데요.." 라는 말로 내 의견을 무시하려들곤 한다. 그러면 내 의견은 쓸모없음으로 판명이 되어버리기에 나는 실없는 말을 하는 존재가 되어버린다. 의기소침해진다. 스스로 인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 의견은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믿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가 던진 "굳이"라는 말이야말로 설득력 없고 실속없는 아집이라며 스스로를 달래본다.


 작디 작은 공장에 처음 발을 내디딘 순간 내 눈에 보인건 제 자리를 지키는 커다란 석판을 제외하곤 질서없이 너부러져 있던 해질대로 해진 박스더미들과 그 안에 여기저기 구겨진 채 쳐 박혀있던 인쇄물들과 필름 그리고 위험하게 걸쳐져 있는 철제 칼들이었다. 


 작업지시서와 함께 내려온 인쇄물이나 필름들은 노란 접착 테이프로 감긴 채 겨우 형태를 유지하는 박스에 쌓여갔고, 작업 번호에 맞춰 제작된 제품과 인쇄물을 동봉하는 일은 여간해선 매끄럽럽게 이뤄지는 일은 없었다. 되려 누락되거나 잘못 전달되는 일이 더 빈번했다. 거기에 짝을 맞추려는데 들이는 시간은 결과가 점쳐진 농구경기의 가비지 타임(garbage time)마냥 소비되기 일쑤였다. 그런 비효율은 기타 잡무를 병행해야하는 내게 커다란 장애가 되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그래서 생각해낸 방법이 24개의 구멍이 4개 층으로 구분된 우산꽃이를 구비하는 것이었다. 2만원이 채 안되는 가격에 사비를 들여 공장으로 주문한 나는 해진 박스를 치우고 양각으로 난 숫자를 검은 매직으로 칠해 번호가 눈에 띄도록 했다. 그리고 그 내부로 잡다한 비품도 넣을 수 있는 데다. 경계선 없이 흐트러진 박스자리에 규격을 갖춘 플라스틱이 들어섬으로써 공간 구획이 확실해진건 덤이다.  


 그 모습을 본 미스터 구지는 내게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굳이......" 나는 그가 나보다 경험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으려는 예의를 차리며 말한다. "별로일까요?" 그러자 그는 단숨에 대답한다. "어차피 금방 찾는데 뭐하러 돈들여 사셨어요. 그리고 굳이 인쇄물 안 맞춰줘도 되요(필름은 반드시 동봉해야한다)" 나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시선을 우산꽂이로 돌린다. 여전히 그의 말은 설득력이 없다. 인쇄물을 꼭 맞춰서 전달하라는 사무실의 요청을 떠나 사소한 세심함 정도는 협업자로서 부릴만 하지 않을까. 게다가 그의 작업공간 뒤로 널부러져있던 은테이프들을 치울 수 있게되어 그는 공구를 정리할 공간을 얻었다.


그 다음엔 필요에 따라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다양한 모양새의 칼이 위태롭게 널부러진 모습이 거슬렸다. 작업자들은 매번 특정 칼을 찾느라 여기저기 뒤섞이고 겹쳐진 칼을 일일이 잡고 뒤지는 탓에 시간은 물론이고 칼을 낭비하는 경우도 다분했다. 또 고민했다.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23.8mm 두께의 칼이 세워져 구분될 수 있도록 그보다 좁은 폭의 칸막이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공장에는 사용하고 남은 버니어 합판이 충분했고 작업은 너무나 간단했다. 하지만 그 영역은 순전히 기계를 운전하기만하는 내가 아니라 작업자들의 영역이기에 그에게 먼저 내 의사를 전달했다. 


"폐합판 조각으로 칸막이를 세워서 칼을 구분하면 편리하시지 않을까요?"


"굳이... 제가 어떻게든 해보려고 했는데, 그냥 이렇게 널부러진게 제일이에요. 그냥 몰아서 정리 한번씩 하면 되요. 서로 정리를 안해서 그렇지...."


일단은 한 발 물러선다. 아무리 좋은 판단이라는 확신이 들어도 상대가 납득하지 못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내 소심함이 이 때만큼은 유용하다 싶다. 그래서 2주 정도 뒤에 아침 일찍 출근해서 간단한 작업으로 내가 생각한 아주 간단한 칸막이를 만들었다. 그리고 다이소에서 산 아크릴 접착테이프로 단단히 고정시킨다. 나름의 고집을 부린 것이었다. 미싱/연마/일반 3개 구역으로 나누어 정리한다. 그리고 사용하는 일이 상당히 드문 인테루/니븐은 구석이 한 데 모아놓는다. 


 그날 오후 사장님이 공장에 방문하신다. "이거 뭐야! 아이 진즉에 이렇게 하지. 이러니까 깔끔하네" 다행이다. 신입직원의 아집으로 비춰지지 않아서 다행이다. 그리고 아무리 단순하고 반복적인 일을 하더라도 아주 작은 변화로 효율을 챙길 수 있다는 점을 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회심의 미소를 짓는다. 복잡한 일을 긴 호흡으로 꼼꼼하게 처리할 깜냥은 못되어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다.


 또 다시 눈을 굴린다. 어떤 환경을 어떻게 바꿀까. 어떻게 하면 실수를 줄이는 방법을 찾을까 애써본다. 이번에는 2440x1220 합판을 적재하는 공간을 어떻게 효율적으로 바꿀까를 고민하고 기계 조작 값과 실측값의 간극을 작업자의 감에 의존하는 방식을 어떤 도구로 오차를 줄일 수 있을까를 고민한다. 여전히 사소하고 하찮은 일이다. 그래도 무책임한 비관주의자는 되기 싫다. 


 누군가의 삶을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는 말을 좋아한다. 그리고 지향한다. 그 이유는 내가 여전히 편견 가득한 시선과 심연 속 저급하고 비열한 본능이 꿈틀대는 미천한 사람이라서 그렇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다. 내게 미스터 구지라는 존재는 내 의견을 지지해주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가 어린시절부터 아버지를 여의고 고등학생 신분에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를 감당해야했으며 끝없이 자신의 가난을 증명해야했고 그러면서 타인의 시선과 타인과의 격차에 스스로를 지키려 자존심을 키워야 했던 사람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그가 부리는 의심은 납득이 된다. 그는 모든 면에서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란 걸 내게 주지시켜야 했을 것이다. 그러니 그가 반대한 것은 내 의견이라기보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보이는 나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외에 그는 내게 훨씬 더 많은 선한 영향력을 건네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실수쟁이에 집중력 유지에 어려움을 겪는 내게 그가 내보인 호의가 언제나 더 컸다. "제가 어떻게든 해볼게요"라는 말을 먼저 내뱉는 멋진 사람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어쩌면 그가 나로부터 거두지 못한 의심들은 내가 만들어낸 것일지도 모르겠다. 다만 그저 나같은 사람도 당신에게 도움이 되고 싶다는 의견을 그가 언젠가는 자신이 지나쳐온 경험을 뛰어넘어 내 의견을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면 훨씬 더 좋은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이건 나 스스로에게도 당부하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어디선가 미스터 구지였고 그렇게 될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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